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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련 동화작가
장세련 동화작가

아주 오랜만에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게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는 것이 옳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이상한 소문들이 돌았다. 친구들이나 선생님의 주변 이야기보다는 학교 건물이나 운동장, 미술실, 음악실, 과학실 등의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대개는 괴담이었다. 아무도 없을 때면 들리는 오르간 연주음,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의 실루엣,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 아무도 없는 과학실에서 갖가지 실험도구들이 부딪치는 소리, 화장실 귀신 등의 이야기들은 학교에 혼자 남아 있는 시간을 정체모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이제는 전설처럼 아득한 이런 괴담을 떠올리게 된 것은 한 권의 책 덕분이다.

 '어쩌다 학교가 집이 되었다'(김윤/창비)는 학교에 숨어사는 준영의 이야기다. 동시에 준영은 흔히 학교에 떠도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실제 작가의 경험과 요즘 고등학생들의 고뇌와 갈등을 중심으로 한 상상력이 낳은 인물이다. 고3은 고뇌의 학년이다. 입시와 진로 걱정만으로도 벅찬 시기다. 이런 시기에 갑자기 맞닥뜨린 가난은 여간한 충격이 아닐 것이다. 갑자기 급식비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을 몸에 두른 아이가 된 준영은 집이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할 공간이 아님을 알게 된 이후 학교로 숨어든다. 전교회장 신지혜의 조건부 도움으로 창고에 자리를 잡지만 책 도둑, 버려진 아이라는 소문의 주인공이 된다. 그런 중에 학교를 집 삼아 사는 아이가 또 있음을 알게 되고, 가출을 노래처럼 되뇌는 후배 소미도 만난다. 

 가출은 위험하다. 온갖 위험이 도사린 정글을 헤쳐 나갈 힘도 없이 뛰어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준영과 같은 상황에서 갈 곳은 뻔하다. 청소년 쉼터를 찾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대부분은 거리를 방황하다가 만나는 친절의 장갑을 낀 마수를 잡게 된다. 아버지를 찾는 빚쟁이들 때문에 더는 집이 집일 수 없는 준영은 다르다. 집이든 밖이든 위험이나 비난에 시달릴 것은 마찬가지다. 어디론가 피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찾아든 곳이 학교다. 보호자가 없는 처지에서는 어쩌면 학교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는 많은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청소년들에게 집 다음으로 안전한 장소다. 드러나게는 지킴이와 교사들이 있는 학교는 재학생들을 보호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일까. 학교를 집 삼아 사는 준영의 발칙한 생각을 응원하게 된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의 싹을 키우려는 준영의 의지를 칭찬하고 싶다. 부모나 사회를 탓하다가 비행 청소년이 될 수도 있는 처지의 준영에게 학교가 집이 되었다는 것부터 다행이다.

 공부가 싫다, 학교가 싫다는 청소년들에게 준영은 희망이다. 부모에게조차 보호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기에 학교보다 나은 안전지대는 없다. 공부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생각으로 대학 진학을 위해 애쓰는 준영. 눅눅한 공기에 처지고 늘어지는 장마철 같은 날들,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질 처지임에도 제 앞가림을 하는 모습은 든든하다. 준영은 가출한 소미를 위험에서 구하는 일에도 앞장선다. 완전한 홀로서기는 물론 주변에 선한 영향력까지 미치는 준영은 학교를 집 삼아 살기에 아주 걸맞다. 청소년들에게 가출은 위험한 일탈이다. 가출 청소년일 뿐임에도 준영의 선택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그래서다. 

 학교는 괴담이 도사린 장소가 아니다. 공부만 하는 곳도 아니다. 다양한 친구를 사귀고 좋은 선생님을 통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인격을 형성하는 곳이다. 그렇더라도 학교가 집이 되는 학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학교는 학생들에게 제2의 집이 되어주어야 한다. 갈 곳이 없을 때, 마음 둘 곳이 없을 때 학생들이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곳. 학교에 그런 쉼터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 비좁은 창고에 살면서도 희망을 다지는 준영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창밖에 비가 억수같이 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장마가 조금 더 길어질 모양이었다. 먹구름이 어딘가로 흘러가도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스스로 정한 규칙을 어기고 난 준영의 생각이다. 암울한 상황에서 장맛비를 보면서 불안에 흔들리는 마음인데도 희망으로 읽힌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장세련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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