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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역사를 뒤바꾼 사건이나 역사와 관련된 장소가 있다. 역사적 사건이나 내용, 주역 인물은 익히 알고 있는 사람도 역사적 장소에 대한 기억은 중히 여기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렇게 잊힌 울산의 지명 중에 <초전>이 있다. 기록상으로 보면 울산의 저항정신은 초전의 효심의 난에서 시작된다. 1987년 6월 항쟁이나 노동자 대투쟁, 나아가 일제강점기 때 민족적 항쟁이나 1862년 또는 1875년 을해민란 등의 뿌리라 할 수도 있겠다.

초전(草田)은 1193년 7월의 고려 무인 정권 시기 많은 민란 가운데 규모가 크고 세력이 막강했던 <김사미;효심의 난>의 근거지였고 지금의 울산 땅일 것이 주된 해석이다. 김사미는 운문산(청도)을 본거지로 불평분자들을 모아 난을 일으켰고, 효심은 초전(울산)을 근거로 망명자와 농민 군인들을 모아 약탈과 함께 실권자 이의민과 내통하며 힘을 길렀다. 반란군 수는 수만이었고 1년 뒤 정부군에 의해 평정될 당시 밀성(밀양) 싸움에서 반란군 7,000명이 베어졌다. 반란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되는 부분이다.

초전은 울산이라는 정설에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울산 대신 '밀양설'이 해당 지역을 중심으로 제기돼 울산 향토 사계의 관심과 분발이 필요하다.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등에는 '초전은 지금의 울산광역시'라는 주(註)가 있어 울산 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또 18세기 전국 읍지를 모아 만든 여지도서(輿地圖書) 역원 조에 초전원 등 16개 원이 나오고 16세기 전국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초전원은 고을 서쪽 64리에 있다"라는 구체적인 기록이 확인돼 울산 설의 근거로 충분하다고 하겠다. 원(院)은 관리들이 출장 중에 숙박하는 곳인데 중앙 관리들이 오가면서 많은 물자를 요구하는 등 백성들을 수탈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많던 효심 등 피지배층이 김사미와 연계하여 봉기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후 사료나 기록에는 초전이 보이지 않는다. 

청도 설의 근거인 운문은 지금의 청도로 운문사의 영지였지만 김사미의 근거지였고 성주 설은 성주에 옛부터 초전면이 있었다고 하지만 청도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밀양 설은 근거가 여럿이다. 초전이란 마을이 아직 남아 있고 1936년 안병희의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 '초전은 밀주군(밀양) 무안면 화봉리에 있는데 명종 23년에 효심이 이곳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려사에도 '밀양 저전촌(楮田村·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일대) 일대에서 정부군이 농민군 7,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라고 기록하고 밀주(무안면 화봉리 초전)에 통도사 국장생(國長生)이 있었으며 주변에 많은 천민 집단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2002년 판 ≪울산시사≫역사편의 서술은 의아스럽다. '무인 집권기 울산지역의 농민항쟁' 부분에 '…. 초전(지금의 밀양)의 효심(孝心)의 봉기로 이어졌다'라며 초전을 밀양이라고 기술한다. 초전이 울산이라는 그동안 거의 굳어진 설을 울산시사가 부정하는 셈이다.

집필자의 주를 봐도 이 부분이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주 28에는 고려사 세가 명종 23년 7월(1193년)조를 참조하라는 근거를 제시하지만, 고려사 해당 조에는 '…효심(孝心)이 초전을 근거지로 삼아서'라고만 돼 있다. 초전이 어딘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밀양이라고 단정 지었다.

'딱밭' '저전' '제전'이란 지명이 밀양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울산에도 일부 남아 있다. 초전과 비슷한 발음이라 밀양 저전이 초전이라 치부하기엔 견강부회 느낌이 든다. 밀주징신록 기사는 구전이라 신뢰성에 무리가 있고 국장생표는 울주 삼남면 상천리에도 있다. 여지도서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편의 '초전원'은 울산 설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사료이다. 지형상으로 봐도 서부 울산은 영남알프스 산맥을 두고 청도와 지근거리이고 험준한 산악을 활용한 게릴라전이 용이한 곳이다. 

또 이규보는 위령제를 청하며 "헌양(언양) 싸움에서 분투하다가 죽은 관군의 해골이 들판에 많이 널려 있으나 거두는 사람이 없다"라고 탄식했는데 당시 헌양현 농민군과 관군의 전투가 치열했고 헌양현 농민들이 경주 농민군에게 합세해 전장에 나섰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개 아마추어 향토사 애호가의 글이 어찌 역사학자나 사계 전문가를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지역 향토사계의 분발과 아울러 탐구의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과연 역사는 쓸모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옥석구분(玉石俱焚)은 경계해야 한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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