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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나원 수필가·행복연구소 레아 대표
장나원 수필가·행복연구소 레아 대표

자정 가까운 시간이다. 역사를 빠져나온 딸아이가 나풀거리며 걸어온다. 차 문을 열기 전부터 이미 할 말이 많은 표정이다. 좀 일찍 오면 어떠냐는 타박에 보드게임 카페에서 놀았다는 짤막한 이유를 댄다. 차에 시동을 건다. 다람쥐 도토리 감춘 듯한 입에서 까르르 웃음 섞인 이야기가 쏟아질 것이다.

 딸은 늘 할 얘기가 많다. 게임 규칙을 익히는 것도 빠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꾀를 내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자기 편을 승리로 이끄는 데 한몫할뿐더러 동생에게는 유연하게 져주기도 할 줄 안다. 지든 이기든 놀이 과정을 들려줄 때는 재잘대는 모양새만으로 듣는 사람까지 키득거리게 한다. 놀다가 집에 들어설 때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곳곳에서 놀거리를 찾아내는 아이가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유년 시절에 주로 깍두기였다. 어느 편에 있어도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눈을 희번덕이고 소리를 지르며 노는 아이들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존재였다. 아이들과 어울리긴 했으나 노는 내내 얼른 해가 지기를 바랐다. 뭘 하든 성실히 참여하면서도 제대로 놀아본 적 없이 자란 탓에 나는 즐기지 못하는 어른이 되었다. 

 잘 노는 아이가 대체로 똑똑하게 자란다. 학습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봐도 알 수 있다. 처음 배우는 모든 것에 '놀이'란 말이 붙는다. 숫자나 한글을 배우고 책을 읽는 것조차 놀이로 시작한다. 신체적인 학습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놀면서 부모나 또래와 교감하고, 그러는 동안에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인다. 놀이가 종잣돈이 되어 일생을 살아갈 '뇌 발달'이라는 재산을 증식한다. 

 놀이는 엄마 젖꼭지를 찾을 때부터 시작된다. 익숙한 냄새를 구분하고 흡족한 양을 취하며 혀끝으로 밀고 당긴다. 젖무덤에 손을 얹어도 보고 발을 달싹이기도 한다. 땀이 송글 맺힌 이마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획득하며 생존의 길을 걷는다. 엄마와 눈을 맞추며 옹알이를 하고, 자기가 내는 소리에 즐거워도 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상의 도구인 언어를 장착한다. 그렇게 습득하는 기술이 늘고 탐색하는 세상도 넓어진다.

 살면서 겪는 대다수의 심리적 문제는 잘 놀지 못하는 데 이유가 있다. 부모에서 시작하여 만나게 되는 많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놀이가 순탄하지 못하면 마음의 작용에 제동이 걸린다. 그래서 상처난 마음을 다루는 사람 중엔 유능한 놀이꾼이 많다. 마음을 치유하는 일에 놀이는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자신감이 바닥난 아이에게 작게나마 성취감을 줄 수 있고, 부모의 강압적인 양육 방식에 자율성을 잃은 아이에게는 주도권을 지니게 할 수 있다. 노는 과정에서 나누는 대화는 심리 문제의 정체를 찾아가는 내비게이션이다. 사람을 성장시킨 방법이 놀이이므로 그것이 다친 마음을 치유하는 해법일 수밖에 없다. 

 삶이 지속되는 동안 놀이는 계속된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속 부부는 백 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봄에는 서로의 머리에 꽃을 꽂아주고, 여름에는 물장구를 쳤다. 함께 잘 노는 부부가 행복을 오래 유지한다. 마침내 '이 세상 소풍을 끝내는 날' 놀이는 멈춘다. 아름다웠노라 말할 수 있는 추억을 관의처럼 펼쳐 덮고서. 하여, 삶이 소풍이었다는 천상병 시인의 말은 죽음에 대한 최상의 은유다.

 집으로 오는 내내 딸아이는 명랑하다. "화투도 못 치면 경로당 가서 국수 삶는다는데 어쩐담." 친구와 펼친 활약상을 다 풀어 놓았는지 엄마의 걱정에 귀도 기울여 준다. 내가 경로당 갈 때쯤이면 다양한 보드게임을 즐기게 될 수도 있을 거란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미리 배워 두란다. 머잖아 딸아이 손에 이끌려 보드게임 카페에 가게 될 것 같다. 내키지는 않지만, 놀이에 진심을 다해 볼까 한다. 남들 놀 때 국수는 삶지 않기 위해서. 장나원 수필가·행복연구소 레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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