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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그때를 추억하다

2013년이니까 지금(2024년)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로 살면서 울산지역 다방을 찾아다닐 때 호계역 앞에 귀향다방이 영업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직도 그 다방이 남아있구나' 불현듯 가보고 싶었다. 1987년 10월 잘 다니던 현대자동차에 사표를 내고 자동화 기계 가공 공장을 한다면서 호계 수성 마을 어느 소를 키우던 마구간을 개조해 공장을 차렸다. 직원도 7~8명이 됐다. 공작기계를 설치하고 기계 앞에 웃고 있는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정성스레 절을 하면서 희망찬 미래를 설계했던 20대 후반의 젊은 날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만약 그때 잘됐더라면 지금은 효문 어느 중소기업 규모로 성장했을 텐데, 아쉬웠다. 그러나 모두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창업했던 회사 이름이 이륙정밀이었다. 창업을 결심했던 날이 26일이라서 한글로 이륙이라 했는데 이 회사는 경험 부족 등이 겹쳐지면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궤도를 이탈하더니 추락해 버리고 말았다. 피가 뜨거웠던 시절이다. 현대차에 사표를 내고 나올 때는 신바람이 나서 휘파람을 불었다. 사실 그때는 용기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나 해도 성공할 것만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부딪치는 것마다 생소했고 해결 기미가 없는 일들이 줄을 섰다. 결국은 6개월 만에 가진 것 모두를 털어먹었다. 그때 머리가 아프면 귀향다방에 와서 쉬었다. 그래서 이 다방을 생각하면 그 시절 추억에 가슴이 아팠다. 

 

귀향다방 창문으로 비치는 필자 모습.
귀향다방 창문으로 비치는 필자 모습.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차중락이 부른 번안곡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일부이다. 이 다방을 찾아가면서 일부러 이 노래가 실린 CD를 챙겼다. 이륙정밀을 운영할 때 자주 들었던 노래다. 이 노래는 서늘한 바람이 부는 만추에 더 깊은 맛이 난다. 

 까마득한 추억을 들추면서 소문을 듣고 이 다방을 찾아간 날은 가을 햇볕이 유난스레 따뜻했다. 역 주변 빈터마다 고추가 햇볕에 온몸을 말리고 있었다. 목가적인 정겨운 가을풍경이었다. 역 광장 느티나무도 아름답게 물든 단풍잎들을 바람에 떨구는 중이었다. 낙엽이 된 잎들은 바람에 떠밀려 구석마다 수북이 쌓였다. 

 가을은 누구나의 가슴에 마른 바람구멍이 나는 경험을 하게 만들면서 떠나가는 것이리라. 

 

생강차가 한잔에 2천원이다.
생강차가 한잔에 2천원이다.

 

 '아니 이를 수가!' 

 역 들머리에 다방이 떡하니 영업 중이었다. 

 타향에서 오매불망 고향을 그리워했을 사람들, 호계역에 내려서 나오다가 귀향다방 간판을 보는 그 소회가 어땠을까, 고생을 한 순서대로 가슴이 미어지는 크기도 달랐을 것이다. 성큼 다가서서 다방 출입문을 열었다. 새시 문이 오래됐음을 말하듯 삐거덕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리면서 순간 코끝에 확 다가오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꼬지래 한 냄새. 7080 세대들의 향수가 코끝을 자극했다. 뭐랄까, 이 기분, 한참을 지나니까 적응이 됐다. 

 마담이라 불러야 할지,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50대 후반 여자가 반백의 아저씨와 앉았다가 일어나더니 반갑게 자리를 안내했다. 가죽이 낡았고 실밥이 터진 소파에 엉덩이를 들이밀고 마주한 벽을 보았다. 언제 도배를 했을까 누렇게 변색된 벽지에 붉은색으로 '금연'을 고딕으로 인쇄해 붙였다. 

 들어오기는 했는데 마담과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용무가 있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장님, 커피 한 잔 주세요." 했더니 마담이 웃었다. 혼자 오는 사람은 대부분이 일 없는 단골 노인들뿐인데…, 그도 이상한 듯 습관적 화법으로 “한잔 만요?"하고 되물었다. “사장님도 한잔하세요" 했더니 내 것은 봉다리 커피, 즉 추억의 333 다방 커피를 내왔고 자신은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서였다. 

 커피는 옛날식 다방의 꽃 그림 커피잔이 아니라 볼품없는 머그잔에 담았다. 잔이 깊어서 커피가 가문 날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느껴졌다. 혼자 마시는 커피는 맛을 음미하고 자시고 할 것은 없다. 

 훅 들이키는데 팔팔 끓는 물을 부어왔는지 순간 뜨거워서 잔을 들다 말고 내려놓았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 대신에 요구르트를 단숨에 마신 마담이 “커피 잘 마시이소."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한잔 사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옛날에는 커피 한잔 사주고 듣는 마담과 레지들의 시시콜콜 인생유전 이야기가 어떤 소설보다 더 재미가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 아가씨들은 다방이라는 물장사 특성상 일면식 없는 타지에서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사투리를 듣고 떠나온 고향을 짐작했었다. 

 물장사를 하지만 그 시절 다방 레지 아가씨들은 또순이들이 많았다. 그중에 필자가 아는 아가씨도 있다. 그녀는 공장이 많아서 돈 벌기 좋다는 소문에 울산 와서 독하게 마음먹고 돈 벌어서 고향 집에 소 한 마리 사주는 것이 희망이었던 최양이었다. 그녀는 반구동 물레방아다방에서는 박양으로 불렸는데 귀향다방에 와서는 최양이라고 자신을 소개해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 약값에, 동생들 학비도 책임져야 하는 것이 그녀의 어깨 위를 누르는 짐이었다. 지금은 어디서 잘 살고 있는지…. 

 오늘도 그렇고 그런 사연 있는 마담이나 레지가 있었다면…. 아쉬움에 빈 입맛만 다셨다. 주방 앞에 배추가 몇 포기가 있었다. 마담은 인심 좋은 단골 영감님이 배추를 뽑아가다가 들러서 몇 포기 인심을 쓴 것이라고 했다. 마담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눈치 없는 커피가 식어버렸다. 그냥 커피잔을 밀쳐두었다. 성냥곽이라도 있다면 매미 집이라도 지어 볼 텐데, 탁자 위에는 금연한다 해놓고 재떨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간혹 단골이 담배를 피우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탁자는 누군가 심심풀이 삼아 담뱃불로 지진 흔적이 빈틈이 없을 정도다.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나가야 할 때가 됐다 싶어서 일어서다 마담에게 언제 다방을 인수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무덤덤하게 10여 년 정도 됐다고 했다. 그녀는 이 다방이 호계 최초 다방이라고 자랑을 했다.

 다방 내부를 둘러보는 필자의 눈치가 이상했던지 마담은 묻지도 않았는데 호계역이 송정동으로 옮겨가면 다방을 폐업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좀 누추하지만 돈 들여서 굳이 인테리어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값을 물었더니 한 잔에 단돈 2천 원이라고 했다.

 “좀 더 받아도 될 낀데" 

 마담은 “토박이 어른들 덕분에 겨우 유지되는데 커피값을 올리면 안 된다"라고 손사래를 쳤다. 출입문 쪽으로 나서자 마담이 앞서 문을 열어주었다. 문밖까지 나와서 잘 가라고 인사까지 했다. 때마침 동대구에서 부전역으로 가는 우등 열차가 구내로 들어왔고 30여 명의 사람이 개찰구를 지나 몰려나왔다. 그들은 아무도 귀향 다방에 들리지 않았다. 

 

귀향다방이 2년전 어느날 남도막창으로 바뀌었다.
귀향다방이 2년전 어느날 남도막창으로 바뀌었다.

 

마무리

귀향다방은 수많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호계역과 함께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역이 1922년 10월 25일 영업 개시 후 2021년 12월 28일 영업을 끝낸 날을 헤아려보니 100년의 세월이 도도한 강물처럼 흘렀다. 

 지난 2022년 4월 초, 호계역 기념사진이라도 남겨 둬야 할 것 같아서 찾아갔을 때는 “아뿔싸" 역이 문을 닫고 시기가 좀 지난 뒤였다. 역은 모든 출입구가 쇠줄로 감겨있었다. 대합실 입구에 북 울산역으로 이전했다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깨금발을 하고 담장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젓가락처럼 곧게 뻗어있던 철길도 이미 걷혀버렸다. 그냥 맨 자갈밭이었다. 플랫폼에 남은 것은 호계역 팻말뿐이다. 허망했다. 하지만 저 팻말마저도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진 몇 장을 급히 찍고 돌아서야 했다.

 철도영업은 접었지만 호계역사(驛舍)는 지역민들의 염원대로 근대문화유산으로 남아지길 기원했다. 플랫폼 곳곳에 설치 미술작품이 있고 대합실 벽에 시화 작품들이 액자로 걸리는 날, 호계역은 그 오랜 세월을 견뎌온 파란만장했던 시절 이야기를 쏟아낼 것 같다. 

 공단 도시, 곳곳에 다방이 지천이던 시절, 울산은 사람 사는 냄새가 진동했다. 다방이 사랑방 역할을 했었다. 다방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지금, 우리는 어디서 온기 나는 사람 냄새를 맡아야 할까. 

 식물로 치면 다방은 보존해야 할 근대문화유산 1급 위기보호종 아닐까. 이제 호계에는 다방이 한 곳도 남아있지 않다. 다방 종자 씨가 말라버렸다. 문을 닫은 역과 역전 귀향다방을 엮어서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일에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더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호계역사(驛舍)가 근대문화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여는 날, 귀향다방도 함께 복원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또 찾아와 이 다방에서 흘러간 옛이야기를 하면서 너스레를 떨고 싶다. 

 연탄난로 화덕에서 보글보글 끓는 엽차를 마시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마담이 타주는 커피 3, 프리마 3, 설탕 3, 즉 '333 다방 커피'를 마시는 게 꿈일까. 부디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빈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 추신

지난 2022년 5월 11일 호계 장날 주차를 위해 찾아간 호계역은 2022년 8월1일까지 농소 1동 임시파출소로 사용한다는 현수막이 나붙었다. 호계역은 영업 개시 100년 만에 파출소로도 이름표를 달았다. 

 “호계역이 파출소가 되다니, 원래 역 앞에 파출소가 있어야 정상인데…"

 임시파출소가 떠나가고 나면 또 어떤 이름표를 달까.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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