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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나원 수필가·행복연구소 레아 대표
장나원 수필가·행복연구소 레아 대표

설거지는 잡념을 끌어들이는 자석이다. 물소리에 맞춰 눈과 손만 협응하고, 머릿속은 어수선하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는데 침대 옆에 둔 찻잔이 생각난다. 찻잔을 가지러 가다 보니 사람 없는 화장실에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화장실 열린 문틈으로 치약이며 수건이 흐트러져 있는 게 보인다. 문을 왈칵 열고 들어가 청소를 한다. 욕조까지 닦고 나니 손대는 곳마다 뽀드득 소리가 날 것 같다. 개운한 기분에 커피나 한잔할까 해서 부엌으로 간다. 개수대에는 여전히 밥풀과 고춧가루를 묻힌 설거지 더미가 들어앉아 있다. 움직이는 틈마다 잡생각이 끼어든 탓이다.

 업은 아이 삼 년 찾는단 말은 옛말이다. 요즘은 귀에 대고 있는 휴대전화기를 찾는다. 통화 중에 전화기를 찾느라 한 손이 바쁘다가, 놓쳤던 정신줄을 잡고서는 기가 찬 듯 웃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무언가를 하려다 말고 '뭘 하려고 했더라?' 우두커니 서 있는 일은 또 어떻고. 자동차 시동을 걸다 말고 '가스레인지 불은 껐나? 현관문은 닫았나?' 고민하는 일은 외출할 때 당연히 거쳐야 할 단계가 되었다. 누가 망각을 신이 준 선물이라 했던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커피 한잔을 타서 식탁에 앉는다. 피식 웃음이 난다. 설거지하던 걸 어찌 그리 까맣게 잊고 화장실 청소를 했는지. 다시 없을 청소인 듯 잡념 한 가닥 안 집어넣고 세면대며 욕조를 닦던 모습이 마치 무아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으니 말이다. 

 병증일까 불안한 망각은 아니었다. 암전(暗轉)이 된 무대에 단 하나의 또렷하고 둥근 조명 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주위 모든 것은 사라지고 한 줄기 불빛 속에서 움직임이 더 특별해졌다고나 할까. 꼬질꼬질한 설거지 더미가 까맣게 잊히면 어떠랴. 그 순간만큼 내가 하는 일에 신바람 났으면 그만이지.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있는 많아진다. 하고 싶어도 단념해야 하는 일과 마지못해하는 일도 덩달아 늘어난다. 그것들이 자주 엉킨다. 그러니 잡념이 많아질 수밖에. 사람이 하루 동안 하는 생각의 수가 오만 가지란다. 그것들은 꼬리를 물면서 번식한다. 그러다 보면 생각의 지류(支流)는 덤불이 되어 뒤엉킨다. 그러니 잊지 않으면 잊히기라도 해야 산다. 

 오만 가지 생각 중에 일부는 불이 꺼지고 일부는 지워져도 괜찮다. 싱크대에서 설거지할 때는 침대 옆 찻잔 하나쯤은 잊어도 될 일이다. 켜 놓은 불은 나중에 보았어도 될 일이다. 그나마 화장실 문을 열고서 주위가 암전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곳에 한 줄기 조명이 들어왔기에 망정이지 수건에서 세탁기로, 유리세정제에서 현관 유리로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면 나는 온종일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망각은 신이 준 선물 맞다.

 친정에 제사를 지내러 갔던 날이었다. 일손 좀 거들까 하여 나는 일찍 부산에 내려갔다. 남편은 회사 일을 마치고 느지막이 도착했다. 도착한 시간이 달랐으니 차를 대어놓은 곳도 서로 달랐다. 모처럼 만난 형제들과 보낸 시간이 행복했던지 돌아오는 차에서도 남편과 나는 오붓했다.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도로 위에 가로등은 영롱했다. 달은 밝았고 음악 사이사이 끼어드는 자동차 엔진소리는 경쾌했다. 해운대 광안대교를 다 지났을 때, 아차! 동네 어귀에 오도카니 혼자 서있을 내 차가 생각났다. 친정에 갈 때는 각자 차를 타고 갔으나, 올 때는 한 차에 몸을 실었으니 남겨진 한 대는 어찌하고 있을꼬. 

 각자 차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집으로 오는 길은 적막했다. 함께 가던 때보다 가로등 불빛은 탁해졌고 달도 일그러진 듯 보였다. 그땐 들리지 않던 "요금 천 원이 결제되었습니다" 소리가 더없이 크게 들렸다. 어이가 없다가도 웃음이 났다. 남편과는 차를 함께 타고 다닐 기회가 드물었다. 건망증 덕분에 모처럼 심야 드라이브를 했으니 놓친 기억이 고마울 따름이다.

 건망증은 '健(굳셀 건, 튼튼할 건)'자를 쓴다. 인생을 건강하게 할 잊음이라는 뜻일까. 어쨌든 인생 절반에 다다르면 어지간한 건 잊고 웃으며 살라고 신이 준 선물인 건 틀림없다. 장나원 수필가·행복연구소 레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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