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그리고 무지무지 그간의 세월이 궁금했다. 이 다방에 들락거렸던 기억들을 주마등처럼 더듬기 시작했다. 마지막 들렀던 날이 언제였을까. 아마 승용차를 사고 난 뒤부터였지 않았을까. 내가 언제 승용차를 샀지? 그랬다면 2000년대 초반까지는 가끔 왔을 것 같았다. 현대차를 그만두고 자동화 전문기업을 창업했고 경험 부족으로 회사가 망했을 즈음 마침 창간한 지역 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했다. 기자 시절,  이 다방에서 원고지를 꺼내놓고 기사를 쓰기도 했었다. 시내버스노선이 좋았기 때문에 자주 찾았다. 

 사건담당 기자들은 취재용 차를 타고 다녔지만 문화부 기자였던 필자는 급할 게 없어서 취재용 차량을 이용할 기회가 없었다. 온종일 걷는 뚜벅이로 살았고 시내버스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모두가 잘살게 되고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 대국이 되면서 집마다 승용차가 생기면서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이야깃거리들을 많이 잊어버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빨리빨리' 편리성만 추구하며 그렇게 추억들을 까마득히 잊고 살다가 오늘 태화다방을 만난 건 기쁨이었다. 차를 두고 나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차를 갖고 나왔다면 태화다방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있는지 없는지도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고 신호등의 불빛에 따라 그냥 움직였을 것이다. 살다 보면 가끔은 이런 재수도 있음에 세상 살맛이 나는 것 아닐까 싶다. 차를 두고 나온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음에 거듭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말 다방 문을 열어놓았을까. 조바심이 났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친다면 이미 참새가 아니지, 나도 다방 문이 열려 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커피나 한잔하고 갈까" 마음과 몸이 동시에 결정을 내렸다. 2층 다방 계단을 발걸음 소리가 나게 뛰듯이 올라갔다. 다행스럽게 문은 열려 있었다. 중년으로 뵈는, 7080 청춘들 같은 두 명이 낡은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 다방도 주인 마담 혼자서 영업하고 있었다. 

 바둑을 두고 있는 저 양반들이 젊었던 시절, 이 다방은 빈자리가 없었다. 지금의 태화루 터에 로얄 예식장, 또 바로 옆에 용궁예식장이 있을 때는 레지가 3명이나 있는 이 근방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잘나가는 다방이었다. 특히 이 다방은 신랑과 신부 친구들 즉 우인들이 서로 만나 상견례 하던 곳이었고 피가 끓는 청춘들끼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초면에도 낚싯밥을 던져 낚아채는 경우도 제법 있었다. 그래서 또 짝을 이루는, 어찌 보면 다방은 청춘들의 삶에 매우 필수적인 곳이었다. 

 태화다방은 조망도 압권이었다. 강 건너 남산 은월봉과 10리 대밭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었다. 또 남구 월평(태화 로터리)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차를 놓친 사람들이 우정시외버스 터미널로 걸어오는 모습을 창가에 앉아서 지켜보는 것도 누구를 기다리던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재미 중 하나였다. 

 또 하나, 오월 이맘때는 강 둔치 밀밭도 볼만했다. 싱싱하게 푸르렀던 밀밭은 혈기왕성한 청춘들 때문에 해마다 쑥대밭이 됐다. 제대로 된 수확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는 그 시절 밭 주인들의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웃음이 났다. 왜 밀밭에 갔을까. 돌아보면 참 아름다웠던 시절의 달콤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 

 태화다방을 들렀던 기념으로 나오면서 간판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때는 다방건물이 헐릴 것이라는 생각도 못 했다. 

 

울산의 랜드마크 태화루. 정은영 제공
울산의 랜드마크 태화루. 정은영 제공

 

 아련한 추억들

이 다방을 들락거렸던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울산이 공업 도시로 급성장하던 시기의 절정이기도 했지만, 필자가 1978년 5월 현대차 울산공장에 입사한 후, 뜻한 바 있어 1981년 야간대학을 다니던 시절이기도 하다. 

 20대 초반, 그 나이 때는 돌을 먹어도 소화를 시킬 때였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나면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이 시간이면 청춘들은 왕성한 식욕으로 늘 배가 고팠다. 라면집이 눈에 아롱아롱했다. 간신히 무거동 라면집들의 유혹을 물리쳤지만, 우정 지하도 정류장에 오면 그냥 내려서 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 시장 골목으로 뛰었다. 

 지금이야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변했지만 5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골목은 30년 전 당시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식당들도 그때 장사하던 사람들이 많다. 단지 젊었던 주인들이 나이를 먹었을 뿐이다. 이 식당 골목은 시계탑 사거리 옥교동 옥골시장만큼 유명한 식당가였다. 우정동 일대 주민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시외버스를 타러 왔다가 차표를 구입한 후 어중간한 시간을 맞추기 위한 사람들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던 곳이기도 했다. 시외버스터미널이 1999년 후반 남구 삼산동으로 옮겨가기 이전까지는 늘 북적거렸던 골목이다. 

 우리는 라면 등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나면 꼭 누군가가 커피로 입가심을 해야 한다면서 '문화인답게'를 외쳤다. 모두가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모두 태화다방으로 몰려갔다. 이렇게 자주 가다 보니 어느 날 필자 위치가 요즘말로 치면 우수회원 같은 단골 수준으로까지 업그레이드됐다. 단골 대우가 별거는 아니지만 아무 때나 가도 초란 노른자를 띄운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그 시절 청춘들은 무지무지 바빴다. 1980년 기능직 사원이라는 호칭이 생기기 이전까지 기능인들은 현장에서 공돌이 공순이로 불렸다. 그 시절, 전봇대에 '밀링공 모집'이라는 쪽지 광고가 '다방 레지 모집' 쪽지 광고와 아래위로 나란히 붙은 것은 흔한 일이었다. 

 

우정시외버스터미널 자리. 정은영 제공
우정시외버스터미널 자리. 정은영 제공

 

 우리는 그 천한 호칭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울산 공전과 울산대 야간학부 대학생이었다. 기능사 자격증이 있는 경우 군 입대 영장이 나오는 날부터 5년간 특례보충역으로 군사훈련까지 받아야 하는 이중 삼중 일을 동시에 해냈다. 모두가 억척스레 살았다.

 휴일에는 밀린 빨래를 해야 했고 과제를 하느라 정신없을 만큼 바빴지만 그래도 틈이 나는 시간에는 취미생활로 단골다방을 찾아 커피를 마셨다. 대부분이 시계탑 사거리 일대 음악다방을 갔었지만, 필자는 밥 대신 가끔 자장면이 생각나듯 시계탑 다방들을 지나서 태화다방까지 갔다. 모처럼 이 다방에 가면 마담과 레지가 반색하며 반가워했다. 그 친절이 양정동 현대차 숙소에 살았던 필자가 시계탑 음악다방들을 지나서 태화다방까지 같던 이유이기도 했다. 아니면 레지가 이뻐서였을까. 여하튼 둘 중 하나는 분명했다. 

 당시의 기억하나를 떠올린다. 1982년 1월 5일 역사적인 통행 금지가 해제됐다. 그 며칠 후가 월급날이었다. 우리는 각자 현금을 얼마씩 추렴해서 통행 금지 해제 기념으로 우정시장 골목으로 갔다. 식당에서 저녁 식사 겸 1차를 끝내고 2차는 태화다방으로 몰려 갔었다. 그리고는 입구에서 마담에게 “오늘은 올 따블 티(모두 도라지 위스키)다"하고 큰소리를 쳤다. 마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는 순간이었다. 그 시절 다방 매출은 '티'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마담들은 울산 큰 공장들 월급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찾아갔을 때는 대충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레지들까지 한잔 씩 하고 일부러 11시 20분 마지막 시내버스를 놓치고 우정 지하도에서 숙소까지 택시를 탔었다. 왜냐하면, 그날은 통행 금지 해제기념이었기 때문이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던 시절 추억이다.

 울산에서 태화(太和)는

태화는 사실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될 고귀한 이름이다. 그러나 울산에서는 미장원, 다방이나 홍등가 술집까지도 태화라는 이름을 흔하게 사용하고 있다. 울산시가 십수 년 전 정명 600년, 울주가 정명 1,000년이라면서 축제까지 개최했지만 사실 태화라는 이름은 1,300년의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신라 선덕왕 때 경주 황룡사 9층 목탑과 통도사, 태화사를 창건한 자장스님으로 까지 줄을 대야 하기 때문이다. 

 태화사는 통도사에 버금가는 큰절이었지만 임란(壬亂) 때 불탄 후 400여 년이 지난 2014년 5월 태화루만 간신히 그 터에 복원됐다. 이 누각 앞을 유유히 흐르는 태화강, 그리고 용금소 굽이치는 물길만이 과거를 기억하면서 도도하게 1,300년의 세월을 흘러왔다. 여하튼 태화라는 이름이 울산이나 울주라는 지명보다 더 역사가 깊다는 말이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마무리

태화다방은 남구 태화로터리에서 태화 다리를 건너오면 바로 마주 보는 위치다. 울산 관문 다방이었던 남구 공업탑로터리 원다방만큼이나 유명한 원도심 관문 다방이었다.

 우정동 지하도 정류장에 내려서 지하도를 건너 시외버스터미널 방향으로 나오면 바로 만나는 3층 건물 2층 태화다방. 바로 옆에 용궁예식장이 잘나갈 때는 이 다방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 다방에 약속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만큼 휴일은 특히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문득 태화강 용금소 물안개마냥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레지 아가씨들이 비좁은 테이블 사이를 용케 흔들며 커피잔을 들고 지나가는, 그녀들의 미니스커트 걸음걸이에 한눈팔던 시절이 떠올라서 웃음이 난다. 연방 울려대는 계산대의 전화기 3대를 붙들고 손님과 연결해 주느라 마담은 잠시도 고개를 들 틈이 없었던 그때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이 다방의 봄날이었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딸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