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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은 유난스럽게도 더웠다. 그 뜨거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그늘을 찾게 마련이다. 하지만 일상에 얽매여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한가롭게 그늘만을 찾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아닌가. 자동차를 몰고 울산의 대표 찻길인 번영로를 달리다 보면 중앙화단에 심어진 짙푸른 가로수의 싱싱함이 한순간 무더위를 잊게 해주곤 했다. 늦가을인 요즘은 노랗고 빨갛게 물들어가는 잎새들이 도심 속에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생활에 활력을 주고도 있다. 그 가로수가 느티나무다.

 

   
 

느티나무는 고향 마을의 옛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우리의 민족정서를 나타내는 나무다. 여름날 촌로들이 짙푸른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 앉아 장기를 두고는 했다. 삼복 더위를 피해 우리의 토종 누렁이도 느티나무 그늘을 찾아 어슬렁거리고는 했다. 고향 마을의 정겨움이 물씬 풍겨나는 모습들이다.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머금어진다. 삶의 여유를 느끼게 한다. 예부터 느티나무가 많이 심어진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우리 조상들은 마을을 이룰 때 마을 초입이나 한 복판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논의하는 사랑방 구실을 할 정자나무를 심었다. 정자나무로는 느티나무를 최고로 쳤다. 가지가 동서남북 사방으로 고르게 펼쳐지고, 깨끗한 잎이 무성하게 우거지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 마을의 80%가 정자나무로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통계까지 있을 정도다. 그래서 느티나무가 유난히 고목(古木)이 많다. 느티나무 외에도 팽나무와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세 나무가 우리 나라 3대 정자나무로 꼽힌다.
 느티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큰키나무로서 키는 대개 26m 정도까지, 그리고 줄기의 둘레는 3m 정도까지 자란다. 잎은 길고 둥글고 끝은 뾰쪽한 타원형이며 가장자리는 톱니바퀴처럼 생겼다. 길이는 2-7㎝ 정도이지만, 13㎝나 되는 것까지 있다. 어린 잎은 나물로 무쳐 먹을 수도 있다. 잎 모양으로 두 종류로 구분된다. 잎이 긴 것은 긴잎 느티나무, 둥근 것은 둥근 느티나무다. 잎은 가을에 황금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더욱 멋스럽다. 꽃은 4-5월에 암꽃과 수꽃이 같은 나무에서 따로 핀다. 열매는 10월에 작고 둥글납작하게 익는다.

우리 민족정서 상징…마을 사랑방 구실
은행·소나무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고목


 느티나무는 무늬와 색상이 아름답고 중후하여 최고의 목재로 꼽았다. 사람들은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소나무 가구를 쓰고 죽어서는 소나무 관에 묻히는 것을 선호했지만, 실제로는 느티나무 집에서 느티나무 가구를 쓰고 죽어서는 느티나무 관에 묻히는 것을 최고로 쳤다고 한다. 신라의 천마총이나 가야 무덤에서 나온 관은 거의가 느티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재질이 뛰어나 건축재와 선박재로 많이 쓰인다.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흰 머리가 검어지는 효과가 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는 있지만, 한방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예부터 심어진 나무였던 만큼 100살이 넘는 고목(古木)이 많다. 소나무, 은행나무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고목으로 꼽힌다. 1,000살이 넘는 65그루 가운데 느티나무가 25그루로 가장 많다. 천연기념물만도 13그루나 된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많은 전설도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북 임실군 오수면의 개가 주인을 구하고 죽은 이야기다. 고려 때 최자(崔滋, 1188-1260)가 지은 '보한집(補閑集)'에 실려 있다.
 <옛날 오수고을에 개를 끔찍히 사랑하는 노인이 있었다. 어느 봄날 장터에 다녀오던 길에 술이 취하여 잔디밭에서 잠이 들었다. 공교롭게도 산불이 나서 노인이 있는 곳까지 번져왔다. 개는 웅덩이를 찾아 몸에 물을 묻혀 뒹굴기를 거듭하여 불을 껐으나 죽고 말았다. 잠이 깬 노인은 개를 묻고 지팡이를 꽂아 주었다. 그 뒤 지팡이는 싹이 터 나무로 자랐다. 사람들은 나무를 개 '오(獒)'자와 나무 '수(樹)'자를 붙여 오수, 즉 '개나무'라 부르고, 마을이름도 오수>라고 했다. 그 개나무가 바로 느티나무로 오수에서 자라고 있다. 개를 기념하는 동상도 세워져 있다.
 울산의 노거수 느티나무 가운데 단연 으뜸은 북구 강동동 당사마을의 느티나무다. 가장 나이가 많은 최고(最古)이자, 그 우람한 몸집으로 최고(最高)의 느티나무다. 500년이나 된 그 나무에 뒤지는 느티나무로는 북구 대안동 상대안마을의 450년생 느티나무와 동갑인 울주군 두서면 미호리 중동마을의 느티나무가 있다. 두 나무의 수형은 당사마을의 느티나무에 뒤지지 않는다.

 500살 '最古' 우람한 몸집 '最高'
북구 강동초 동해분교 인근 자리

 

   
 

 당사마을의 느티나무는 추억의 학교와 자연사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는 옛 강동초등학교 동해분교를 지나 강동축구장 조금 못 미쳐 2차로 찻길에서 바닷가로 들어가는 작은 마을길을 따라 10여m 내려가면 왼쪽에 있다. 남향한 2층 콘크리트 건물인 당사마을회관을 겸한 어촌계 사무실과 같은 구내에 있다.
 북구청이 세워 놓은 표지석에는 '지정번호 12-31. 지정일자 2000년 12월 30일. 수종 느티나무. 수고(키) 15m. 수령 450년. 나무둘레 1.85m(근원 5.8m)'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울산생명의숲이 펴낸 '울산의 노거수'에는 다르게 적혀 있다. '추정수령 400-500년. 수고(키) 9m. 수관폭 24.7m. 가슴높이 둘레 5.5m. 뿌리부분 둘레 5.54m. 용도 당산나무'로 돼 있다.
 밑둥치가 환히 드러난 동편에서 느티나무를 살펴봤다. 서쪽으로 50도 가량 비스듬히 굽어졌다. 지표면에서부터 1.8m 쯤에서 몸통이 남북 방향으로 두 가닥으로 나뉘었다. 전체 모습은 서쪽으로 누워 있는 형국이다. 북쪽 몸통은 1m 가량 위로 치솟은 뒤에 한 가닥은 곧게 자랐다. 다른 가닥은 90도 수평으로 서쪽으로 뻗었다. 곧게 뻗은 것은 동쪽으로 작은 줄기를 한 개 내질렀다. 서쪽으로 뻗은 것은 바로 곁에 있는 블록 담장을 넘어 밭에 길게 작은 줄기와 가지를 내놓았다. 그 길이가 15m 가량 돼 보인다.
 남쪽 몸통은 정남쪽에서 30도 가량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위·아래 두 개의 큰 줄기를 내놓았다. 위쪽 것에서는 곧 바로 동남쪽으로 한 개의 작은 줄기가 났다. 그런 뒤에 남서쪽으로 20m 가량 뻗었다. 아래쪽 큰 줄기는 남서쪽으로 60㎝ 가량 뻗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렇게 서쪽으로 30여m 가량 뻗어나가면서 가지와 가지를 연이어 내놓았다. 줄기와 가지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담장 너머 서편 밭에 내려 앉을 듯 하다. 줄기와 가지가 찢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위쪽과 아래쪽 큰 줄기에 철사줄을 매어 놓았다. 북쪽 몸통의 큰 줄기에도 철사줄을 매여 놓았다.

염분에 취약…바닷가 수백년 생육 경이로와
행정기관 '살아있는 문화재' 보호에 힘써야

 

   
 

 밑둥치가 구불구불하게 뒤틀려 있다. 마치 꿈틀꿈틀 살아 숨쉬는 듯 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날 것만 같다. 밑둥치에는 청태도 잔뜩 끼어 있다. 오랜 연륜을 엿볼 수가 있다. 외과수술한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아픔을 용케도 참고 이겨내어 살아남은 것은 정녕 동해 용왕의 가피 때문임이 분명하다. 본래 느티나무는 염분에 취약하여 바닷가에서 수백년을 생육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당사마을의 느티나무는 바닷가 환경에 적응하며 500년을 내려왔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느티나무는 서쪽 2차로 찻길에서 바닷가로 들어가는 마을진입로 초입에서 바라보는 것이 가장 낫다. 동쪽은 인가에 둘러싸여 있어서 제대로 볼 수가 없는데다, 또 줄기와 가지가 거의 없는 탓에 텅 비어 있는 허술한 모습만을 보여 줄 뿐이다. 서쪽에서 보면 전체적으로 원추형의 균형 잡힌 몸매를 내보인다. 최상단부에서부터 맨 아래쪽까지 네 단계의 층(層)을 이룬 듯 하다. 만추(晩秋)인데도 잎새들은 아직도 푸르름이 가득하다. 여름날의 그 검은 색조를 띈 듯한 짙푸름은 많이 가시고 노랗게 물들고 있다.
 느티나무 옆 북쪽에 기와지붕을 갖춘 작은 당집이 있다. 당집 바로 앞에도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당산나무인 느티나무에는 견줄 수가 없지만 그래도 꽤 우람하다. 반대편인 남쪽에는 아랫도리에서부터 위쪽까지 푸른잎을 온통 뒤집어 쓴 고깔 모양의 은행나무도 있다. 그리 넓지 않은 구내에는 또 다른 느티나무와 팽나무 다섯 그루로 빽빽하다. 거의가 키는 10m 가량에 굵기도 1m를 훌쩍 넘는 거목들이다. 팽나무는 아직도 푸른 윤기를 내뿜고 있지만, 느티나무는 울긋불긋 단풍으로 채색중이다. 살갗을 간지럼 먹이는 햇살과 살랑살랑 불어대는 해풍(海風)을 알맞게 쐰 덕분인지 나무 맨 위에서부터 아래로 노랗고 빨갛게 물들고 있다.
 당사마을 느티나무처럼 생육환경이 바닷가인 곳은 좀처럼 드물다. 그래서 유전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13그루의 느티나무 가운데에도 당사마을 느티나무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보호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수년 전부터 울산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데도 행정기관은 모르쇠로 있다. 울산의 행정기관이 하루빨리 노거수도 우리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문화재임을 깨달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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