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누구보다도 난감한 것은 영월 군수와 임영복이었다. 보다 못한 영월 군수가 버럭 고함을 쳤다. "무슨 짓들이오? 방금 주상전하께서 승하하셨다 하지 않소.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곡을 하시오." 웃음소리가 잠시 끊어지기는 했지만, 곡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떼꾼으로 일하는 산 사람이 당돌하게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좋은 잔칫날 곡을 왜 합니까? 곡은 내일부터 하고 오늘은 즐겁게 놀아봅시다. 얼쑤 좋다. 왜 이리 좋을꼬." 이선달이 임영복의 안색을 살피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제 네놈의 운도
임영복이 자신의 부모에게 큰절을 올리고 윤미와 아이들에게도 절을 올리게 했다. 각동 강변의 돌을 짊어지고 떠나간 지 꼭 이십 년이 흘렀다. 멀리 각동 강변 건너편의 뼝대바우를 쳐다보았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발아래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성영의 아버지 조영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꾀죄죄한 옷차림에 거지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딸과 아내가 죽고 나서 새장가는 엄두도 못 내고 홀아비로 지내니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임영복은 조영환을 무대 위로 불러올렸다. 임영복 앞에 선 조영환은 두 다
특히나 우족이나 돼지족발을 다루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웠다. 돼지족발을 다룰 때는 불을 피워 털을 태운 다음 칼로 긁어내는 게 보통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곱 치 칼 한 자루로 털을 깨끗이 잘라낸 다음 뼈와 뼈 사이의 힘줄을 모두 발라내었다. 족발을 들고 작업을 하는 동작이 다람쥐가 알밤을 들고 놀리는 듯했다. 사람들은 예전에 동네에서 사라졌던 임영복이란 사내가 되돌아와서 사는 걸로 착각하는 때도 있었다. 밤마다 각동 강변에 나가 시간을 보내는 걸 보면 그런 착각에 빠질 만했다. 임영복이 영월에 온 뒤 사흘 뒤에 각동마을에는 큰
정축년에 순흥이 폐부가 된 후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어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장꾼들이 넘어 다니던 길은 토끼나 고라니가 다니는 길로 변했다. 정축년에 목숨을 걸고 소백산을 넘어와 영월에 자리 잡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순흥은 역모의 고장으로 낙인찍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렸다. 정축년으로부터 십일 년이 지난 무자년 9월이었다. 영월에는 때 아닌 손님이 들이닥쳤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의금부도사가 식솔들을 거느리고 영월을 방문했다. 식솔이라 봐야 젊은 새댁과 똘똘한 아이들
영월이라면 임영복이 제격이었다. 십 년 전에 영월 관아에 머문 적도 있어 지리에는 환했다. 영월에 잠입한 임영복은 바로 관풍헌을 찾아가지 않았다. 영월 관아에서 한참 떨어진 변두리에 허름한 집의 방을 하나 얻어 기거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관내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폈다. 그러기를 사흘째 되던 날이 영월 장날이었다. 점심때가 되어 장터 한쪽에 있는 국밥집에 들었다. 국밥집 발을 헤치고 들어서자마자 낯익은 얼굴들을 만났다. 바로 마구령에서 만났던 언양 무사들이었다. 언양 무사들도 바로 임영복을 알아보았다. “어서 오시오. 노형. 언
윤미를 데리고 한양으로 올라간 임영복은 한 대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이 사냥에서 성공하고 돌아온 사냥개 같았다. 한 대감은 눈앞에서 꼬리를 내리고 있는 임영복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라면 순흥 부사 이보흠과 함께 오라를 지어 올라왔어야 하는 임영복이었다. 이보흠과는 다르게 자신이 살길을 용케 알아채고 살아 온 것이었다. "그래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이 처자는 누군고?" 한 대감은 윤미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밉지 않은 얼굴이었다. "예. 이 처자가 금성대군의 시녀였는데 격문을 빼내
정상에서 윤미가 소피를 보러 잠시 숲속으로 들어간 사이에 두 사람은 사이좋게 황천길로 떠나가고 말았다. 임영복이 주먹으로 뒤통수를 슬쩍 치니 그대로 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다. 시체는 경사가 심한 비탈길에 그대로 굴려버리고 말았다, 윤미가 숲속에서 볼일을 마치고 나와 보니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어디를 갔습니까?" "으응. 풍기에 잊어버리고 온 물건이 있어 가져오라고 보냈다. 우리는 먼저 가자꾸나." "저 보따리는 놓아두고 가셨네요?" "그래? 그 보따리를 풀어 보아라." 윤미가 주섬주섬 보따리를 풀어보니 수태에
경군은 하루 동안 순흥에 머물면서 온갖 분탕질을 했다. 그런 다음 곧장 구구들로 가서 이수형의 집을 둘러싸고 철통같이 지켰다. 경군 대장도 왜 이수형을 지키는 지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단지 명령만 따를 뿐이었다. 이수형은 이번 일의 핵심에 올라 있는 사람이었다. 한명회는 이번 일을 계획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이 바로 이수형이었다. 금성대군이 순흥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만날 사람이 이수형이라는 사실도 꿰뚫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올라 온 사발통문에도 이수형의 이름은 버젓하게 올라 있었다. 나이는 이제 겨우 22살이고 벼
풍기 현감 김효급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순흥부의 관노인 급창이 두 여자를 데리고 가져온 것은 산천을 뒤집어 놓을만한 내용이었다. 격문을 읽는 내내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이걸 놓고 어물쩍거리다가는 장차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아랫것들을 시켜 격문을 가져온 세 사람을 대접을 잘하라고 이르고는 손수 말에 올랐다.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내달리면서도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잘만 하면 이번 기회에 출세 길에 들어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문을 받아든 한명회는 곧장 대궐로 들어가 수양을 만났다. 수양은 입이
대장이 아궁이 앞에 지긋이 누워 바지를 내리고 있었다. 주막집 주모가 머리를 대장의 사타구니에 처박고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일어나 자신의 치마를 훌렁 걷어 올리고 대장의 양물 위에 살포시 앉았다. 아궁이 안에 불꽃이 일렁이고 있는데 대장의 얼굴도 아궁이 불꽃만큼 벌겋게 익어 있었다. 솥뚜껑이 들썩이며 밥물이 끓어 넘쳤다. "허허. 이런 산골 여편네가 방중술이 보통이 아니구나." "대장님은 정말 힘이 센 장부이십니다. 소인이 만나본 남정네 중에 최고였습니다. 항상 옆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허허. 그게 진심이더냐?" "진
"오늘 나를 살려준 걸 후회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매달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네놈이 자랐다는 각동 돌밭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대문 안에서 갓을 쓰고 살더라도 내가 한 말을 잊지는 말아라." "하하하. 네 놈이 두 발로 일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임영복은 군사들을 시켜 산채에 불을 지른 다음 마구령을 내려갔다. 마구령을 다 내려가 처음 맞닥뜨린 것이 풍기 댁이 운영하는 주막집이었다. 윤미가 떠나간 뒤에는 임장호와 소운 부부가 풍기 댁을 도우며 새살림을 살고 있었다. 풍기 댁은 난데없이 나타난
이백여 명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인 여덟 명은 이게 자신들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물러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양쪽 사이에 흐르고 있는 그때 산채 안에서 임영복이 나타났다. 임영복은 느긋한 걸음으로 마당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잠시 기다리시오." 군사들은 임명복이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이선달의 앞으로 다가온 임영복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아무리 용을 써보아도 이렇게 되게 되어 있었소. 위에서 이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소. 형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꼭두각시놀음에 놀아난
망설이는 김장복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군사 한 명이 바가지에 탁주를 가득 담아와 건네주었다. 김장복은 탁주 바가지를 받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 들이켜고 난 다음 꿇어 엎디어 있는 안흥선을 노려보았다. '내 좆을 자른 놈. 내 좆을 자른 놈.' 몇 번이나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탁주 기운이 올라와 더욱 힘이 났다. "어서 실행하시게." 군사 한 명이 재촉했다. 김장복은 성큼성큼 걸어가 안흥선의 옆에 섰다. 가오리 채찍으로 자신의 등짝을 후려치던 사내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
한명청은 김장복에게 예천 댁의 주리를 틀라고 했다. 그런데 김장복은 차마 예천 댁의 곁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뭐야. 그년이 네 계집이라고 봐주겠다는 거냐? 그럼 네가 대신 형틀에 묶이겠느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뭐라? 그렇게 하겠다고? 이것들이 목숨 소중한 줄을 모르고 나대는구나. 너는 잠시 빠져 있거라." 한명청은 예천 댁에게 받은 모욕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군사를 시켜 예천 댁의 주리를 틀게 했다. “아아악. 내가 죽어서도 네놈 뒤를 따라다닐 것이다. 어디 네 명대로 사는지 두고 보아라." 예천 댁은 말을 마
순흥부에는 안흥선의 식솔들이 모두 불려와 있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아이를 안고 있는 안흥선의 처 예천 댁이었다. 예천 댁은 죄를 지은 사람마냥 아이를 품에 안고 고개를 잔뜩 숙이고 있었다. 한명청은 안흥선을 향해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네 죄는 네가 알렸다. 일개 처사가 어떻게 관아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는지 낱낱이 고해바치거라." 안흥선은 낯빛이 백랍처럼 하얗게 변해 고개를 떨구었다. 순흥 부사 이보흠도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안흥선의 입을 닫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여봐라. 당장 형틀을
그 시간에 윤미는 대군이 건네준 두루마리를 품에 안고 열심히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간밤에 순흥 부사가 배소에서 물러간 뒤 대군은 윤미의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윤미는 처음으로 자신의 손을 잡은 대군 앞에서 몸을 가볍게 떨었다. 이선달이 일러준 대로 이런 식으로 가면 자신이 언젠가 대궐에 들어가 살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윤미의 손을 잡은 대군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풍랑 속으로 들어와 있구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단단히 듣거라." 대군은 시렁 위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었
"이런 고약한 일이 있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한명청이 이보흠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보흠도 김장복의 상처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안흥선이 옥에 다녀간 뒤 한때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직접 양물이 잘린 상처를 보기는 싫었다. 안흥선이 왜 김장복의 양물을 잘랐는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유는 묻지 않아 모르고 있었다. "말을 해보시오. 저게 뭣이오?. 국법에 양물을 자르는 일도 있습니까?" 한명청이 이보흠을 다그치자 김장복이 설움에 복받쳐 엉엉 소리내 울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요. 여자가
말을 마친 임영복은 다시 산채로 들어갔다. 산 사람들은 아까보다 더 술렁거렸다. 동쪽으로 가면 살 수 있다니 얼른 도망가는 게 맞지 않느냐고 떠들었다. "다들 들으시오. 정 살고 싶은 사람은 떠나도 좋소. 남아서 목숨을 바쳐 싸울 사람만 남으시오." 처음에는 서로 눈치만 살피더니 몇몇 사람이 무리를 지어 자리를 뜨자 모두 우르르 몰려갔다. 남은 사람은 언양 무사들 다섯 명과 두 사람이 고작이었다. 이선달은 남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왜 같이 떠나지 않느냐고 물었다. 둘의 대답은 똑같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동쪽으로 간다고 살 것
이선달은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은 대군에게서 들은 이야기이지 출처를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대군이 철기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이상하지만 그것을 부인하는 임영복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네는 세상 돌아가는 내용을 어디서 듣고 있는 겐가? 아직도 저쪽에서 자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것인가?" "당연한 것이 아니겠나. 낮에 잡아먹을 소에게도 아침 여물은 먹인다네." "그럼 철기군이 온다는 것은 왜 나온 것인가?" "자네는 손자병법이라고 아는가? 거기에 나오는 36계중에 초타경사의 계가 나온다네. 풀을 쳐서 뱀
밤이 늦도록 두 사람이 짜낸 계획이라는 것은 아주 단순했다. 안동에서 올라오는 군대를 막을 수는 없으니까 백두대간의 고갯길만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끌어모은 무사들은 모두 산적으로 가장 시켜 죽령고갯길에 배치하도록 했다. "지금 마구령에 있는 노각수라는 산적은 저쪽의 일급살수인 임영복이라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계유정난에 황보인 대감을 주먹으로 쳐서 죽인 자라 합니다. 함길도의 이징옥 장군을 제거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합니다." "그런 자가 어찌 벼슬길에 있지 않고 살수로 남아 있는 것이지요?" "원래 사냥한 꿩은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