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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괘천을 다녀간 시인묵객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바위에 남았다.

#작괘천과 작천정

강이 품은 정자들을 보러 가던 길. 강에 스민 계절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봄은 곧 올테지만 아직 멀었고 남쪽의 매화는 아직 꽃봉우리도 맺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태화강 백리 작괘천과 대곡천에 포은 정몽주(1337~1392)의 고단했던 삶의 흔적들이 남았다.
 포은이 울산 언양 요도로 귀향온 것이 고려 말 우왕(1376)때 였다. 그의 울산과의 인연은 1년이었다. 감천과 남천의 합류지점인 언양 어음리가 요도였다. 두물머리에 퇴적된 삼각주의 옛 이름이기도 했다. 포은은 여기에 거처를 마련하고 대곡천 명경지수의 반구대에서 그 암울한 시기를 이겨냈다.

 간월산에서 생겨난 물줄기가 언양 쪽으로 길을 튼 것이 작괘천이다. 작괘천 낮은 언덕위에 작천정이 있다.
 작괘천 느른 반석위에는 시간의 흔적이 뚜렷하다. 바위와 물이 서로 몸을 섞어 만든 곡선의 무늬다. 무늬는 파고들거나 위로 스쳤다. 그것들은 크고 작은 웅덩이거나 대패로 민 듯이 매끄러운 길의 형상이다. 강물에 제 살을 덜어낸 반석위로 맑은 물이 언 듯 녹은 듯 비단처럼 흐른다.

 작괘는 술잔을 걸어놓았다는 뜻이니 옛사람들의 비유가 적합하다. 움푹 패인 술잔위로 옥수 같은 물이 넘쳤다. 휘영청 달이라도 밝은 밤에는 작괘천 술잔마다 달이 뜨고, 사람들은 그 달을 음미했을 것이다. 꽃비 내리는 봄날에 향기를 마시고, 서늘한 가을바람 한 잔 마시는 풍류가 넘쳐났을 것이다.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그 흔적은 작괘천 바위와 작천정에 남아 오늘날까지 선명하다.
 작천정은 고종 31년(1894년)에 언양 현감 정긍조가 뜻을 모았고 1902년 여름에 언양 군수 최시명이 세웠다. 현재의 작천정은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2005년에 중건된 건물이다.
 
▲ 울산에서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는 집청정.

 
#집청정과 백련정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는 중국 무이산 아홉 구비의 절경을 무이구곡이라 칭하고 그 절경 속에서 학문을 닦고 글을 썼다. 또 풍광을 시와 그림으로 남겼다.
 조선에도 성리학이 발전한 16세기 이후부터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시작으로 구곡을 경영하고 시와 그림으로 문화를 향유했다. 빼어난 자연풍광에 형성된 구곡은 단순히 아홉 구비의 공간만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을 드러낸 이상향이었다.

 대곡천의 옛이름은 반계다. 옛사람들은 반계구곡을 경영하고 시와 그림을 남겼다. 반계가 울산 구곡문화의 중심이었다. 그 구곡문화 소통이 집청정에서 빛을 발했다.
 집청정을 세상에 뿌리 내리게 한 사람은 조선 영조때 최신기다. 경주 최씨 문중 정각으로 울산에 현존하는 몇안되는 원형을 가진 정자다.
 집청정은 '집 앞의 맑음을 모으는 정자'라는 뜻을 가졌다. 정면 3칸에 측면 1.5칸으로 가운데는 마루가, 좌우로 방이 놓였다. 오른쪽이 '청류헌', 왼쪽에 '대치루'다. 물소리 듣기(聽流) 좋고, 반구대를 마주 보고 있다(對峙)는 의미를 담았다. 

 집청정은 반구대를 찾는 많은 시인묵객의 숙소로 이용됐다. 갑오경장 때까지 집청정에 머물면서 이곳의 풍광과 정서를 그린 흔적만도 300여명에 400여편의 작품이 전한다. 그 작품들을 후손 최준식(1909-1979)이 정리해 '집청정시집'으로 묶었다.
 현재 건물은 1932년에 중수했다. 그러나 집청정은 사연댐이 생김으로서 출입문이 다섯차례나 옮져지는 부산을 겪어야 했다. 사연댐에 물이차면서 옮겨졌고, 길을 낸다고 안으로 잦아들었다. 지금은 보기에 안스러울 정도로 처마와 붙은 형상이 돼버렸다.

 대곡천 상류 어디쯤 30m 절벽위에 백련정이 있었다. 마치 연꽃처럼 희고 깨끗한 기암괴석을 바라보는 절벽위에 세운 정자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정조(1784년) 때 경주 출신 진사 최남복이 주인이다. 그는 그곳을 백련서사라 명명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백련정은 지금 대곡댐 수몰로 인해 봉계의 한 한의원 뒤뜰로 옮겨졌다. 집은 목숨을 연명했지만 원래 터를 잃어버렸다. 백련정에서 대곡천을 바라보는 일이나, 밖에서 백련정을 보는 일이나 눈과 마음의 호강이었는데, 이젠 기약할 수 없는 아득한 옛일이 됐다. 그러나 함께 전해오던 최남복의 목판 문집 141매와 꽃이 백일을 간다는 목백일홍도 그대로 옮겨 갔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 태화강이 강다운 면을 갖추기 시작한 입암리. 선바위 뒤로 용암정이 숨은 듯 자리잡고 있다.


#반구서원과 모은정

두 개의 댐에 막혀 물길이 끊어진 듯 이어지는 대곡천은 구비 구비 휘돌아 태화강으로 든다.
 그 한 구비에 장엄한 바위절벽이 나타난다. 물은 오랜 세월 흘렀지만 견고한 바위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 나갔다. 그 형상이 영락없는 거북이가 엎드린 형태라 반구대다. 예전 겸재 정선이 청하(포항) 현감시절 찾아와 그 내리뻗는 화법으로 그리기도 했다.

 정몽주가 유배당한 곳은 요도지만, 그곳에는 아쉽게도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되레 대곡천을 따라 더 많이 남아있다. 포은이 자주 찾던 반구대와 그를 추앙해 세웠던 반구서원이 있고 그를 기리는 유허비가 있다. 포은뿐만 아니라 많은 선비들이 이 구곡을 찾아 시를 읊고 그림을 그렸다.
 반구대 주변의 빼어난 산수가 선비들의 발걸음을 이끌었고, 자연스럽게 누정이 세워지면서 문학과 학문이 번성하는 토대가 됐다. 한강 정구(1350~1418)가 그랬고, 회재 이언적(1491~1553)과 권해(1639~1704)가 그 뒤를 이었다.

 조선 숙종(1712) 때 언양 유생들이 포은, 회재, 한강을 추앙해 반계서원을 세웠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문을 닫았다가, 1983년에 반구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됐다.
 반구서원 맞은편 툭 튀어나온 언덕이 거북의 머리. 그곳에 '포은대영모비'등 비석 3기가 서있는 비각이 있다. 사연댐으로 인해 1965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아래 절벽에는 반구대를 찾아온 이름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반구대, 포은대, 옥, 선등의 각자들은 주인이 없어진지 오랜시간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시인들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물이 흘러 쉽게 접근할 수 없지만 그 이름들 사이에 학 그림도 보인다. 날개를 접고 등 쪽으로 부리를 향한 모습이 이색적이다.
 반구서원 뒤편에는 포은 정몽주를 사모한다는 의미를 담은 모은정이 있다. 청안 이씨 문중의 정자로 1920년 이정혁의 형제들이 만들었다.
 
#관서정과 용암정

태화강은 범서에 오면 서서히 강의 모습을 갖춘다. 폭은 넓어지고 물은 덩치를 제법 키웠다. 그 강에 기댄 사람들의 삶이 자리를 잡았다. 사연, 망성을 지나 다시 한 구비 크게 돌아 중리, 구영에 이르기까지 휘감는다. 그 강의 혜택에 일찍 자리잡은 곡연마을에 관서정이 있다. 경주 김씨 김 경(1683~1747)이 주인이다. 조선 영조 때 지은 정자다.
 사연댐이 들어서기 전에 이 정자 앞으로 맑은 물과 계곡이 절정이었다는데 지금은 그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멀어져 버렸다. 지금은 남루한 누각으로 남았지만 한때는 글 읽는 소리 낭랑했다.

 울산도호부사였던 권상일이 반구대를 찾아가다가 선비의 글 읽는 소리에 발길을 잡혔다. 소리의 주인공이 김 경이었다. 이 인연으로 권 부사는 자주 찾아 학문을 논하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권부사가 울산을 떠나면서 아쉬움을 달래려 자신의 떠남을 보아달라는 의미로 관서정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지금의 건물은 해방이후 후손들이 중건했다.

 돌아가는 물의 정점에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가 솟아 있는 바로 뒤편 절벽위에 숨은 듯 강과 정자가 하나인 듯 서있다. 용암정(입암정)을 세상에 뿌린 내린 사람은  1796년 울산도호부사 이정인이다.
 용암정은 강을 닮아 편안하다. 도드라지지않고 배경으로 거기 앉아 있을 줄 아는 겸손한 모양을 가졌다. 화려하지 않고 담백한, 수수한 멋이다. 그 수수함 속에서 선비들은 시대를 내려다 보며 후학들을 양성했다. 한국 중세사와 성씨 연구의 대가였던 이수건과 일제 강점기 이관술이 이곳에서 한학을 배웠다.

 용암정에 올라서 선바위를 내려다보면 태화강의 검푸른 물이 아찔하다. 몰아쳐 내려온 물이 절벽에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깊은 소가 생겼다. 그 소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이 들리기도 했다.
 저물어가는 겨울 오후, 용암정에서 바라보는 입암들의 풍경이 아름답다. 강이 흘렀고, 그 강을 따라 길이 흘렀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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