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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 화려하고 뛰어난 건축미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누각이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조선후기 대표적 누각 건축물

 

 #절경을 굽어보는 영남제일의 누각 영남루
 밀양은 오래전부터 영남의 대표적인 유교 본산지, 흥겨운 가락의 밀양아리랑, 깔끔한 빛깔의 백자 고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영남학파의 김종직과 사명당 송운대사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밀양의 젖줄은 남천강이다. 이 남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 언덕에 세워져 있는 영남루는 밀양에서 가장 유명한 옛 건축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3대 누각으로 손꼽혔다.


 영남루가 있던 곳은 고려시대 공민왕 때까지 영남사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다. 정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무려 20칸이 넘는 큰 건축물이다.
 누각 옆에 각각 능파당과 침류각이 부속 건물로 있다. 침류각과의 연결 부분은 3단 계단인 월랑으로 이뤄져 있어 한층 아름답다. 현재의 영남루는 밀양부사 이인재에 의해 조선 헌종 때인 1844년 밀양도호부의 객사 부속 건물로 지어졌다.
 영남루 아래에는 조선시대 명종 때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아랑낭자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세운 아랑각이 있다.
 계단을 올라 영남루 마당에 이르니 남쪽으로 2층 누각이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본다. 영남루는 2층의 본루 외에 좌우에 침류각과 능파각이 있어 더욱 웅장한 느낌을 준다. 본루인 영남루는 조선 후기 우리나라 건축을 대표하는 국내 제일의 누각이다.


 영남루 영역에 있는 또 다른 건물로는 사주문과 일주문 그리고 객사로 사용되던 천진궁이 있다.
 영남루는 남천강에 연한 절벽 위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 한 칸의 간격이 넓고 기둥이 높아 누마루가 아주 높고 웅장해 보인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붙어 있으며 계단으로 연결된다. 층계로 연결된 침류각(枕流閣)이 서편에 있는데 층계가 길고 경사가 급한 편이다. 이에 비해 동쪽의 능파각(陵波閣)은 계단이 짧고 경사가 거의 없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러 안전을 도모했고 기둥 사이가 넓어 사방 경치를 조망하기가 좋다. 특히 남쪽 남천강과 그 너머 밀양 들판의 전망이 아주 좋은 편이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鬼面) 모양의 꽃받침을 하나씩 배치했다. 안 둘레의 높은 기둥 위에는 이중의 들보(樑)를 설치했는데, 들보에 돌출된 용 머리가 인상적이다.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누각의 기둥과 들보에는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현창관'(顯敞觀) 등의 현판 외에도 옛 선인들의 글귀가 여럿 걸려 있다.
 

   매년 음력 3월15일·10월3일 제올려

 

 #단군과 역대 왕조의 시조를 모신 천진궁
 영남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천진궁(天眞宮)이다. 영남루에서 마당을 건너 북쪽 방향으로 만덕문이 있고 그 문을 들어가면 천진궁이 나온다.
 이곳 천진궁은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시조를 모신 전각이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 팔작지붕의 조선 후기 건물이다. 1974년 12월 28일자로 경상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됐다.
 천진궁에는 한 가운데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동쪽 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락의 시조왕과 고려 태조왕의 위패를 모셨고, 서쪽 벽에는 신라, 백제 시조왕과 발해고왕, 조선 태조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음력 10월 3일에 개천대제라는 이름으로, 3월 15일 어천대제라는 이름으로 제를 올린다.

 

   해방전후 가요계 이끌었던 작곡가


 #작곡가 박시춘 선생 옛집
 천진궁을 나와 왼쪽 언덕을 보니 초가집이 한 채 보인다. 이곳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생가다. 박시춘(1913-1996) 선생은 대중음악 작곡가로 유명하다.
 그는 해방 전후 우리 가요계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작곡가다. 그는 '애수의 소야곡'을 처음 작곡했고 1937년 가수 남인수가 이 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시켰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등이 있다. 생가 앞에는 박시춘 선생의 흉상과 '애수의 소야곡' 악보와 가사를 적은 노래비가 서 있고 그가 작곡한 노래가 잔잔하게 울려 나온다.
 이마의 깊은 주름, 벗어진 머리, 검은색 선글라스 그리고 나비 넥타이가 그의 상징이었다.

 

  '봉황이 춤 추었다'는 전설 간직


 #천년고찰 무봉사
 영남루와 천진궁이 같은 영역에 있다면 무봉사와 아랑각은 언덕을 돌아 다른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무봉사 가는 길 역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일주문을 지나 무량문(無量門)에 이르니 법당이 보인다. 보물 제493호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진 대웅전이다.
 무봉사(舞鳳寺)는 영남루의 전신인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암자로 추측된다. 무봉사의 무봉은 봉황이 춤을 추었다는 의미인데, 이 이름의 근거는 혜공왕 9년 77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곳 영남사에 주석하고 있던 법조선사(法照禪師)가 절의 마당을 거닐고 있을 때 큰 봉황새가 춤을 추며 날아 와 앉았다고 한다. 이에 스님은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그 이름을 무봉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영남사가 없어지고 영남루가 지어지면서 무봉암이 무봉사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무봉사에는 보물인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불상의 형태와 광배(光背)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이 석불은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이다. 현재 무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산인 통도사 포교당으로 소속되어 있다.

 

   매년 4월16일 억울한 죽음 애도

 

 #아랑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진 아랑사
 무봉사에서 강쪽으로 내려가면 대숲 사이로 전설적인 인물 아랑(阿娘)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이 나온다. 아랑사이다.
 아랑은 조선 명종때 밀양부사의 딸로 성은 윤(尹)씨이며 이름은 정옥(貞玉) 혹은 동옥(東玉)이다. 나이는 열여섯으로 재기 넘치고 자색이 뛰어난 규수감이었다고 한다. 태어난 지 겨우 수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품에서 자라났으며 외동딸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밀양부사의 외동딸이었던 아랑낭자는 유모의 꼬임에 빠져 달구경을 나갔다가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신임 수령이 부임할 때마다 잇따라 의문의 죽음을 당하니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신임 부사(府使)가 부임해 아랑의 원혼을 만나 기막힌 사연을 듣게 되었다. 이에 부사는 유모를 처형하고 아랑의 원한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밀양 사람들은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정절을 기리기 위해 영남루 아래 아랑의 시신이 떨어졌던 대밭에다 열녀사(烈女祠)라는 사당을 짓고 매년 4월 16일에 제사를 지내 왔다.
 이 사당이 1930년에 아랑각이 되었고, 1965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면서 이름이 아랑사(阿娘祠)로 바뀌었다. 현재 아랑사 안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글= 최인식기자 cis@·사진= 유은경기자 usy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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