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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전시장너머로 보이는 국립경주박물관. 1913년 시작된 역사만큼 10만여점의 유물이 보관된 곳으로 2만여평의 대지에 4개관이 건설돼있다.

 

 경주 남산이 '산속의 박물관'이라면, 경주 시내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그 유물들의 핵심을 집약시킨 '박물관 중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입장료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년 기념으로 올해 말까지 무료다.
 
 #수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정문을 마주보고선 종각엔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 신종이 걸려있다. 불심 깊은 부부의 아이를 넣어 만들었다는 슬픈 전설의 종은 에밀레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신라 35대 경덕왕이 그의 아버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아들 혜공왕이 유지를 받들어 771년 구리 12만근(27t)을 들여 완성했다. 원래 봉덕사에 걸려 있었으나 1460년 영묘사로 옮겼는데,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아 현 봉황대 옆에 종각을 짓고 보존하다가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종소리의 주파수와 화음도, 질량 등을 수학적으로 계산한 경주박물관의 결과를 보면 상원사종이 65점, 보신각종이 58.2점, 중국의 영락대종이 42.3점, 에밀레종은 무려 86.6점으로 최고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천년을 건너온 '신라의 소리'는 이젠 쇠약해져 녹음으로 밖에 들을 수가 없다. 마침 종소리가 은은하게 봄 하늘을 가로질러 월성을 건너간다. 30분마다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아직 은은하고 긴 여운을 지녔다.
 
 
 #5월의 햇살아래 가부좌를 틀고


 

 고고관을 끼고 돌면 왼쪽에 불두와 부처상들이 있다.
 한때 소중한 염원을 담아 석공의 손에서 빚어졌을 부처상은 코가 깨진 머리만 남았다. 그러나 그 온화한 미소만은 잃지 않고 여전하다.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된 이 불두는 높이가 1.5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로 아직 몸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무동 뒤편에는 하나같이 목이 잘린 부처상들이 줄지어 앉았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이 불상들은 1965년 분황사 발굴당시 우물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땀을 흘리는 불상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조는 유교의 영향으로 유생들을 현혹시킨다하여 목을 자르고 우물이나 저수지에 버렸다한다. 한 시대의 이념이 문화를 말살한 현장인 셈이다. 모든 미술양식들이 꽃이라면 그 이념과 사상은 뿌리다. 따라서 모든 문화유적들은 그 시대의 역사와 이념을 반영한다. 그 이념의 대립이 가져다 준 참혹한 현장이 박물관 뒤뜰에 자리하고 있다. 목이 달아나고 손과 발을 잃어버린 채 건너온 시간들이 5월의 참한 햇살아래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감은사지 석탑과 고선사지 석탑


 

 사무동을 벗어나면 우뚝하게 솟은 삼층석탑을 만난다. 원효대사가 주지로 주석하던 경주시 암곡동 고선사에 세워졌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1975년 옮겨 복원한 것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쌍벽을 이루는 통일신라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고선사 탑(국보 제38호)이 세워지고 80년 후 석가탑이 만들어지면서 신라의 석탑은 그 형식에서 완성을 가진다.
 탑은 기단부에서 옥개석으로 올라 갈수록 훼손 정도가 심해 온전한 형태를 잃어간다. 탑을 이룬 선들은 단순하고 짧고 하늘과 맞닿아 긴 여백으로 남았다. 곡선 아닌 직선만으로 이렇듯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낸 옛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놀랍다. 시간의 흐름 위에서 석탑은 부서지고, 뭉개지고, 깨졌지만 부르튼 손으로 한 땀 한 땀 쪼아낸 석공의 정성이 아직 유효한 셈이다.


 고고관을 마주보고선 야외전시장엔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석재들이 그득하다. 연화주춧돌부터 우물의 상부석이나 다리 난간까지 신라의 시대가 고스란히 옮겨져 있다. 그들은 떼로 몰려 주목받지 못하지만 말이 없이 그 무관심의 시선들을 감내한다. 한때 이름난 절이나 석교 위에서 제 몫을 다했지만 지금은 박물관 한켠에 도열한 하나의 정형화된 유물로 남았다.
 그 추정된 역사를 입은 석재들 위로 오늘의 시간이 흐른다. 길고 긴 세월을 뛰어넘었지만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것을 보면 가야할 길이 먼 모양이다.
 
 #특집진열전 '미탄사 터'


 

 경주박물관은 오는 7월 4일까지 미술관에서 지진구가 석탑에서 처음 발견된 '미탄사 터' 출토품을 전시한다. 지진구는 큰 건물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묻는 것을 일컫는데 목탑 등 목조 건축물에서 확인된 예가 있지만 석탑에서는 미탄사 터에서 처음로 발견됐다. 이번 전시에는 지진구를 비롯해 그릇, 석제품, 청동제품, 흙구슬 등 40여점의 출토품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 넝쿨무늬 암막새는 황룡사, 분황사, 월성해자 등에서 출토된 것들과 비슷한 시기에 만든 것으로 이 사찰의 조성 시기를 가늠해보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미탄사 터는 경주 황룡사 터 남쪽 논 한가운데 있는 삼층석탑 주변으로 삼국유사에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터가 있다. 이것이 최치원의 옛집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미탄사 터에는 석탑 1기가 무너진 채로 남아 있었고 1980년 이 삼층석탑을 복원하기 위해 경주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해 2007년 발굴보고서를 발간했다.
 
 #'마지막 신라인' 故윤경렬 선생


 안압지관 뒤로 인공으로 조성한 연못 고청지와 수묵정이 있다. 고청지는 '하늘도 내 교실 땅도 내 교실'이라며 경주의 문화유적에 각별한 애정을 쏟은 '마지막 신라인'이라 불렸던 고청 윤경렬 선생을 기려 지은 것으로 그 한켠에 수묵당이란 정자를 내었다. 매월 첫째, 셋째 토요일 경주차인연합회에서 다도 교실을 열고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차를 내 놓는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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