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다. 봄 한 가운데서 불어오는 바람 한오라기에도 나른함이 실려 밀려오면 춘곤증에 빠져들기 십상이다. 잠시 그 졸음의 달콤함은 봄빛만큼이나 활력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리고 향 좋은 커피를 마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봄날의 오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다 공연히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싱숭생숭함은 덤처럼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봄은 연초록을 낳고 꽃을 키우는 무한한 힘을 가진 것인지라 春愁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 한낮의 아른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환상 속으로 걸어가는 날이어도 봄이라 좋을 것 같다.춘수春愁이기리낮잠을 자
영화 '리빙 : 어떤 인생'에서 주인공 빌나이가 부른 '로언트리'가 생각이 난다. 죽음을 앞두고 기억 저편에 있는 어린 시절이 마법처럼 얽힌 가지와 첫 새봄을 알리는 너의 잎새라며 내 소중한 나무라 노래한다. 무심히 서 있기만 한 나무이지만 누구에게는 위안이 되기도 하고 추억을 만들어 주는 소중한 나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무에 대한 감정은 대체로 긍정적인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완전한 나무 박라연 전신이 쓸쓸할 때 차오르는 저 가로수의 수액을 잠시 빌려 쓰면 어떨까 연두가 돋아나는 봄 가로수가 되려면 서서 잠드는 나무의 곁을
사람과의 만남에서 유독 정이 많은 사람이 있다. 작은 것에도 상대가 미안할 정도로 따뜻한 눈빛으로 무엇이든 그 이상 정을 담아 표현하는 사람, 부담스러울 때도 있지만 마주하고 있음 그냥 기분이 좋아질 때가 많다. 마음 한쪽에 솜사탕 같은 감미롭고 부드러운 덩어리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다정에 감염되다 이대흠 다정에게는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병아리 털처럼 순하고 병아리 눈동자처럼 동그랗습니다 정은 손을 내밀고 다정을 담은 그릇에는 모서리가 없습니다 다정에는 가시가 많습니다만 너무 많은 가시에서는 가시를
새해가 온 지도 벌써 스무날이 넘었다. 새해 첫날 처음 맞은 그 순간, 순간들이 쌓여 벌써 1월을 다 채워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순간을 이어가며 살고 있는 것이다. 매 순간이 풀어 놓는 것이 새롭게 다가오고 새롭게 사라진다. 새로운 만남도 사라짐도 순간처럼 흘려보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순간은 많은 것을 품고 많은 것을 버리기도 한다. 지금 볼 수 없던 것이 다 지난 후 다시 보일 때도 있다. 시인이 풍경과 맛과 분위기를 응시하고 느낀 순간은 언제나 잠시이다. 짧은 의미이지만 또한 포착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보이는 것과
바다를 가까이 두고도 자주 바다를 보러 가지를 못한다. 고향이 내륙이라 바다는 늘 동경의 아련한 곳이었다. 젊은 날 시외버스를 타고 바다를 찾으면 가는 시간보다 바다를 보는 시간은 짧아 뒤를 돌아보며 떠나오곤 했다. 그래서 나에게 바다는 끝없는 넉넉함보다 간절함을 안겨주는 곳이 됐다. 지금은 언제든 갈 수 있는 바다인지라 안심하고 자꾸만 미루게 되는지 모른다. 시인은 바다를 보고 무엇을 품고 왔는지, 무엇을 비우고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끝없이 넘실대는 파도를 담은 바다를 안고 온 것이다. 파도오창헌 가끔 바다를 보고 온 날은마음이
모나크 나비는 날개 길이가 10㎝도 안되며 동정 한 닢보다 가벼운데 4대가 대를 이어 4,500㎞를 날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 장엄한 비행은 조상들이 갔던 길을 그대로 기억해서 가는 겨울나기 이동이다. 이 풀리지 않은 모나크 나비의 비행은 나비의 유전적 데이터가 쌓여 그럴 것이다는 추측일 뿐이라니 그저 신기하고 나비의 강인한 또 다른 일면을 보는 둣하다 모나크 나비처럼-한영채 호랑 무늬 나비 한 마리 손바닥에 올랐다 기죽지 않는 날개로 살아야 하는데 바람에 푸득 거린다 검은 건반 위에 앉은 그녀 손가락 다섯이 둘 되어 건반
동음어인 말, 시인은 이 동음어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말(言)의 중요성 내지는 다스리는 방법을 풀고 있다. 말(言)에는 야생마같이 저돌적이어서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 때도 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아 그만큼 옛날부터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말이 상심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는. 상심한 말들의 귀로-장상관 함부로 설치는 말은 가장 치명적인 독이다 유리창 깨고 자해하는 야생마가 출현하는 요인은 끝내 참지 못한 말이 화근일 때가 많다 몸 구석구석 독 퍼드리고 소요하는 말들도
'그때 황금세월黃金歲月이었어' 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은 우리의 생에서 몇 번이나 될까. 아니면 한 순간도 그런 날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일 수도 있다. 긴 생에 짧은 순간 행복하였고 아름다웠던 시간이 왜 없지 않았을까. 화양연화花樣年華일 수도 있는 황금세월을 돈으로 살 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일근 시인의 14번 째 시집 『혀꽃의 사랑법』에 실린 '황금세월을 사다' 시에서 기대해보고 싶어진다. 황금세월을 사다 정일근 보이차 포장지에 금박으로 찍힌 황금세월黃金歲月이란 이름이 부러웠는지 내게 황금 같은 세월
기억엔 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너무나 뚜렷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멀어지는 기적소리처럼 희미하기 일쑤다. 기억은 기억 안에 있을 때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메모하는 습관이 기억을 더 오래 유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적응하는 자의 생존법의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닌 적는 자만이 산다는 적자생존을 농담처럼 하지 않은가. 시인은 기억 할 것이 광범위 하여 더 많은 메모가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적지 않아도 되는 것이 슬픔이라는 것에 시의 긴장을 보여준다. 수첩 김경미 도장을 어디다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구름을
이름처럼 팔랑거리며 나는 것이 특징인 '수풀떠들썩팔랑나비'. 나는 모습이 유난히 '떠들썩'한 오클로데스속(Ochlodes)에 속한 나비인 '수풀떠들썩팔랑나비'는 학명(O. sylvanus)에 숲(sylvanus, silvanus : 라틴어로 숲의 신)이라는 뜻이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생소한 나비 이름에 시인이 얼마나 오래 숲을 헤매고 다녔을지, 그 숲 안이 떠들썩거렸을지 짐작이 간다. 그래서 이 시는 팔랑거리며 나는 나비를 따라 가듯 읽게 된다. 수풀떠들썩팔랑나비의 작명가에게 손택수 수풀도 좀 점잖고 싶을 때 있지 나비도 날
수많은 집들이 도시를 메우고 있다. 그 집 한 채 마련하기 위해 앞만 보고 사는 사람들, 그러나 집은 늘 부족하여 사람들에겐 여유가 없다. 그리고 더러는 집을 두고도 더 좋은 집을 향하여 동분서주하기도 한다. 집의 외형만 쫓다보니 진작 집이 가진 감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는지 모른다. 시인이 찾은 집의 감정은 그래서 새롭다. 집들의 감정 마경덕 이제 아파트도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푸르지오, 미소지움, 백년가약, 꿈에 그린, 이 편한 세상… 집들은 감정을 결정하고 입주자를 부른다 생각이 많은 아파트는 난해한 감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타워
당신은 어떤 색을 좋아합니까? 당신은 어느 계절을 좋아합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며 어떤 계절을 좋아하는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어 난감할 때가 있다. 좋아했던 것이 좋아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애하면 쉬운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한쪽만 보게 되니 말이다. 조용미 시인의 '연두의 회유'시에서 본 연둣빛을 찾아 봄날을 쏘다니게 될지도. 연두의 회유-조용미당신과 함께 연두를 편애하고 해석하고 평정하고 회유하고 연민하는 봄이다 물에 비친 왕버들 새순의 연두빛과가지를 드리운 새초록의 찰
글은 문장 속에 의미들을 품고 있다. 그래서 읽고 난 뒤 그 여운을 따라 많은 상상과 같은 호흡을 하기도 한다. 웃기도 하고 눈물을 머금기도 하고, 같이 그 풍경이 되어 어느 한 공간을 나도 모르게 공유하기도 한다. 특히 사투리는 의미 전달을 하는데 효과적일 수도 있다. 정성희 시인의 첫 시집 속에는 서부 경남의 사투리가 시를 생생하게 전하여 준다. 그리고 고령화된 시골의 골목마다 더 늙어가는 외로움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시편들이 많다. 내 꼭꼭 숨었지 정성희 작 -86세 할머니를 찾습니다 정신 지극히 온전하시다 듣
어쩜 누구나 비자금이 있지 않을까. 액수의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그 비자금으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생색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비자금은 혼자 즐기는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새해를 맞고 이런 저런 새해 인사를 나누는 1월은 열두달을 품은 비자금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자신만의 일년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계획하고 기대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만원의 비자금으로 '든든한 신주 단지로 생각하는' 시인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만원의 비자금을 가진 시인의 행복한 마음이 훤히 보
화장지의 눈김시민콧물이 나고 코가 막혀서코를 풀고 화장지를 마구 버렸더니방바닥에 하얀 눈처럼 쌓였어.동생이 보면 겨울 왕국 안나가 되어눈사람 만들자! 하겠지.생각만 해도 즐거운 겨울 왕국에서깔깔거리며 놀다 보니화장지 한 통을 다 뽑아 눈처럼 뿌렸어.엄마 아빠가 보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하겠지눈꽃 세상 속에서뛰고 구르고 뒹굴다가눈을 이불처럼 덮고 눈 천사를 만드는데문이 벌컥 열리더니,-아니, 이게 무슨 꼴이래!엄마 아빠의 눈이 동그랬졌어. △김시민 1994년 부산MBC 아동문학 대상. 2012서덕출 문학상 수상. 2020아르코창작기
꽃의 안감박정옥자매는 무너진 성벽 아래서 분홍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꽃말은 위험, 그리고 강한 독성을 지녔대요협죽도라고도 하죠꽃은 안감 겉감처럼 두 개의 이름과 의미를 가졌다그날도 세 번째 그 언덕을 오르내렸다남아있는 총탄 자국과 충돌하는 풍경이 도시 어디서나 여백을 채우고 있는 꽃숙소에서 가까운 리바거리를 걸었다낡삭은 목재 유리문 가게 안을 들여다보며옥양목에 그려진 꼬레아 풍의 꽃무늬를복사꽃으로 읽을 뻔 했다자다르에서 스플릿까지 오는 동안 나는 내내 꽃의 안감을 읽어 내는 중인데창을 통과한 네모나고 화사한 햇볕은 평생 묻어둔 꽃의
새들은구명자 허리 수술 후 허공에만 사는 아버지직립의 기억은 잊었다뒤집힌 사막거북이처럼 허우적거릴 뿐차라리 껍데기 벗고 새가 되고 싶었다 해종일 창가를 맴도는 새 떼아버지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밥을 줄이고 근육을 줄이고 말수를 줄이고아버지는 겨드랑이가 가렵다고 말했다 가랑잎처럼 가벼워져간 아버지눈치 빠른 새 떼 아.버.지 목청을 떠메고 갔다 질기고 질긴 껍데기만 놔두고 △구명자: 경기 파주 출생. 2019년 '사선'으로 작품 활동 시작. 울산작가회의 회원. 하나문학회 회원. 시집 '하늘물고기' 우
불새가박산하사과나무를 태운다사과를 그리며 난롯불을 지핀다갈라진 틈새로 선홍 불이 파고든다몸 부풀고 금이간다수액을 짠다사과를 갉아 먹던 새둥치를 태우자 불새 한 마리 튀어나온다홰치는 새부리가 빨갛다날개도 발가락도 붉은 몸간혹 푸른 깃털이 얼비치기도 한다맘껏 날갯짓이다사과가 되지 못한 몸파도를 탄다겹겹 파도파동은 파동을 밀고문이란 문 다 열고홰를 치던 불새,새가 나온 사과나무의 몸은 결이 잘 펴진 흑장미 한 송이 피어나고원 없이 타던 몸불새가 되었다장미가 되었다가 △박산하 시인: 경남 밀양 출생. 경주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과 석사.
시김민호 감탄사만 남발하였다뿌리 깊은 아름드리나무숲이 파랗게 뻗어대는 교문바알간 햇살을 머금은아이들 맑은 웃음소리가연두색 바람과 뒹굴다나뭇가지 가지마다 잎 사이사이에서 합창으로 울려 퍼지는 운동장 아! 오래도록 남았으면어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내일이면 도시에 서 있을나는 또 어떡하란 말인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어문자로는 형용하기 힘든가슴 저 깊은 곳그윽한 향기로 담아 둔 오래된 시 한편경북 영천 임고초등학교 △김민호: 경남 양산 출생. 2010년 '시에' 등단. 시집 '아카시아 암자' '참,
풍경을 이루는 아름다운 소리빛깔들나정욱 소리의 빛깔들의 질서정연하게 아침 풍경을 이루고 있다새들이 제각기 소리를 뜯어먹고 있다사람들도 오늘은 무슨 소리로 자신을 드러낼지 소리의빛깔을 골라 옷을 입는다여기저기소리의 빛깔을 리얼타임으로 보여주는 자연의 풍경들시장의 풍경들눈을 감으면 물에 풀리는 기름띠처럼총천연색으로번지는 소리의 노을빛아침놀이나 저녁놀처럼 소리의 빛깔이 저리 아름다운 풍경도없을 것이다 하늘로 오르는 풍등하나저것은 누구의 목소리로 올라가는 소리빛깔의감탄사일까 △ 나정욱: 울산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대학원 졸업 199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