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앞둔 막내가 방학이라 집으로 돌아왔다. 책과 옷가지와 자취할 때 쓰던 살림도구가 담긴 커다란 택배 상자 몇 개와 함께. 그런데 상자 안에 있던 그릇들을 부엌으로 나르다가 그만 밥그릇 하나를 떨어뜨려 깨고 말았다. "가만히 있어. 베일라." 허둥지둥 빗자루며 청소기를 찾아 나서는데 "아, 어쩌지요? 이거 불길한 거 아닌가요?" 막내는 울상을 짓는다. 취업 시험 결과 발표가 며칠 남지 않아서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그릇을 깼으니 무슨 불길한 징조라 생각했나 보다. "무슨 소리야? 춘향이의 거울 깨지는 꿈 모르니? 그거, 깨질 때
'졌잘싸'라는 인터넷상 유행어가 있다. '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뜻이라는데, 2022년 월드컵에 참가한 우리 선수들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속한 H조에는 가나, 우루과이, 포르투갈이 올라왔다. 지난달 24일에는 만만치 않은 우루과이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가나는 이겨야 한다.'이다. H조에서 약한 팀으로 가나를 지목하고 우리나라든 우루과이든 포르투갈이든, 심지어 가나 자신이 주어가 되어 '가나는 이겨야 한다.'가 하나의 밈이 되었
산 아래 아파트에서 살아서인지 가끔 곤충이 집으로 찾아온다. 여름엔 베란다 방충망에 매미가 매달려 한나절 울다 가고, 아파트 복도에 풍뎅이가 뒤집혀 있거나 창틀에서 노린재나 딱정벌레가 발견되기도 한다. 가까운 산속의 수액이나 꽃을 놔두고 이 곤충들은 왜 한사코 사람 사는 집으로 들어오려는 걸까. 불빛으로 몰려드는 오징어처럼 인가의 불빛은 이들에게 치명적인 유혹인가 보다. 몇 해 전엔 아파트 옥상 캐노피 아래 커다란 말벌 집이 있어서 인부를 고용해 떼어내기도 했다. 마침 우리 집 부근이라 베란다 창으로 말벌 집을 제거하는 걸 지켜보았
얼마 전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완역본을 읽었다. 두 권으로 축약한 책은 읽은 적이 있는데 완역본은 처음이다. 무려 5권, 2,500여 쪽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레 미제라블』 하면, 증오에서 자비로, 불신에서 사랑으로 바뀌게 되는 장발장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이 방대한 소설엔 19세기 프랑스의 역동적인 사회상이 버무려져 있다. 뜻밖에도 장발장은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는다. 미리엘 주교에 대한 이야기가 무려 100쪽 가까이 이어진 다음, 2편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오랫동안 변두리에 살았다. 우리 동네는 원래 군이었다가 내가 태어날 때쯤 시에 편입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시의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변두리란 어느 지역의 외곽지대를 말한다. 가장자리이고, 변방이며, 주변지역, 경계지역이다. 변두리, 하면 흔히 허름함, 무언가 떠밀린 삶, 가파른 언덕과 골목집을 떠올리기 쉽다. 실제 내가 방학 때 머물던 서울 이모네도 변두리에 있었는데, 겨울이면 연탄재를 뿌렸던 골목과 시내의 불빛이 아득히 보이던 언덕 꼭대기, 종점으로 향하는 기차가 지나가는 굴다리가 기억난다. 하지만 변두리도 도시 변
"작가는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창설자이며, 언어의 땅을 경작하는 옛 농부의 상속인이며, 우물을 파는 사람이며, 집 짓는 목수이다. 이와 반대로 독자는 여행객이다. 남의 땅을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자기가 쓰지 않은 들판을 가로질러 다니며 밀렵하고, 이집트의 재산을 약탈하여 향유하는 유목민이다." '읽는다는 것의 역사' 머리말에 나오는 이 말은 독서라는 행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작가는 재배하고 독자는 맛본다. 작가는 만들고 독자는 누린다. 누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다독, 정독, 계독, 남독 …. 모두 여러 가지
겨울치고도 유난히 추운 날인데, 왜 복숭아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아마 냉장고 과일 칸을 열다 몇 개 남지 않은 단감을 보고 단감 철도 다 지났군, 하며 아쉬워하다가 갑자기 올해는 복숭아 철에 복숭아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친 것 같다. 며칠 전엔 집 근처 산기슭에 철모르고 핀 진달래 한 송이를 봤는데, 이상 기온으로 제철이 아닌데 꽃이 피는 거야 이젠 예삿일이 돼버려서 심상하게 지나치다 뜬금없이 복숭아 생각이 나기도 했다. 진달래꽃 빛이 복숭아꽃 색깔을 좀 닮았나, 아무튼 겨울 초입에 여름 과일인 복숭아가 떠오르니 철
중고마켓에 화초장 매물이 올라왔다. 40여 년 전에 재벌가에서나 살 수 있던 고급 가구였다고 소개된 화초장은 문갑까지 곁들여 그때보다 4배 가까운 금액으로 값이 매겨졌다. 물가상승을 감안했겠지만 좋은 것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유지되거나 더 올라간다. 색색의 옥돌을 정교하게 깎아 화조나 과일 문양을 만들어 붙인 화초장은 40년 세월이 무색하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놀부가 부자가 된 흥부한테서 괜히 화초장을 탐낸 것이 아니었다."고초장, 된장, 간장, 뗏장, 아이고 아니로구나. 초장화, 초장화, 초장화, 장화초, 장화초 아이고, 이것
아녜스 바르다의 라는 다큐를 보았다. 거두고 남은 이삭, 그러니까 일종의 부스러기를 주워 생활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엔 다양한 종류의 이삭들이 나온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유통기한이 지난 빵, 소세지, 피자들. 야채시장 한쪽에 모아둔 시든 오이, 양배추 등. 가난한 사람들이 이것을 거두어 간다. 물론 바르다의 다큐는 끊임없이 쓰레기를 양산하는 현대의 소비 행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 양산되는 쓰레기를 주워서 생계에 보태고 삶을 유지해가는 쓰레기의 순환에도 관심을 보인다. 아니, 오히려 그 순환의
코로나가 끝나면 가장 하고 싶은 일로 여행을 꼽는 사람이 많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니, 그저 비행기만 타고 하늘을 돌다 내려오는 상품도 순식간에 매진된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라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세계 테마 기행'이니 '걸어서 세계 속으로'니 하는 여행 관련 프로그램이 나오면 눈을 떼지 않고 시청하는 편이다. 얼마 전엔 '그 섬에 가고 싶다'란 프로그램을 보다가 스무 살 때의 남해 여행을 떠올리고 한참 추억에 잠겨서 서성거렸다. 그해 여름, 친하게 지내는 언니와 함께 남해도에
오디오북으로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듣다가 오네긴의 나이를 알고 조금 놀랐다. 오네긴이 친구 렌스키를 결투 끝에 죽이고 방랑길에 올랐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러니까 온갖 풍상과 애환을 맛보고 쉴 곳을 찾아 돌아온 나이가 스물여섯이라는 것. 스물여섯이라니, 스물여섯이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거나 내디딜 준비를 하는 희망에 부푼 나이 아닌가. 그런데 푸시킨은 그 나이를 '지금은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은' 나이로 묘사를 했다.푸시킨이 살았던 19세기 초에 유럽의 평균 수명이 45세 정도였
쓸쓸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쓸쓸한 느낌을 주는 말들이 있다. 11월, 낙엽, 저물녘, 가을비, 빈집 혹은 빈 들판, 그리고 절터, 이런 말들. 지난 일요일 저물녘에 운흥사지를 다녀왔으니 '가을비'를 빼고는 쓸쓸함의 요소를 다 갖춘 셈이다. 운흥사지는 웅촌면 정족산에 있다. 그전에 두서면 구량리의 은행나무를 보러 가서 찬란한 황금빛 잎들에 눈이 황홀해져 있던 터라, 폐사지 들어가는 길가의 반쯤 잎이 떨어진 갈색 나무들을 보니 사색에 잠긴 듯 고요하고 우울해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물결이 일 듯 잔바람이 불면서 남은 잎들이
집안일 중에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빨래라고 대답하겠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 게 아니냐고? 대부분 세탁기의 일이지만 수건이나 행주, 속옷 같은 삶아야 하는 빨래부터 물 빠짐이 있거나 블라우스 같이 천이 상하기 쉬운 옷은 아직 손빨래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빨래는 이불 호청이나 청바지 같은 게 아니라 손안에 잡히는 부피가 작은 걸 말한다. 물론 세탁기가 없을 때야 빨래는 큰 일감 중 하나였다. 일이 힘드니 돈을 주고 품을 사기도 했다. 드가의 이란 그림을 보면 힘주어 다림질하는 여직공 옆에 술병을
십일월이다. 가을이 살짝 모자를 들어 올리며 작별을 고하고 겨울이 외투 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달이다. 상강을 지난 날씨는 갑자기 싸늘해지고, 해가 짧아져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앞세워 집에 돌아오면서 다시 한번 중얼거려본다. 십일월이네. 벌써, 어느덧, 이제, 어느새 십일월이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기분. 시월엔 카톡에 간간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같은 가을에 대한 노래들이 올라오더니 십일월엔 그마저 침묵이다. 십일월의 노래는 어디로 갔나. 그러고 보니 아침마다 노래하던 뒷산의 새들도 이제 지저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