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고 울산문화예술회관 뜰에 벚나무 가지마다 탱탱한 봄물이 오르고 있다. 반갑다. 울산문학 봄호에 실을 테마기획에 '슬도'와 '태화강'을 청탁했다. 편집실로 들어온 원고를 읽으며 저마다의 강과 섬에 관한 작품을 읽는다. 퍼내도 퍼내도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강과 바다가 재미있다. 자연이 개인에게 교감하는 순간은 각양각색이어서 그럴 것이다. 테마기획은 '울산에 산다'라는 특집으로 나가는데 여기는 울산의 자연, 문화, 그리고 울산을 상징하는 산업, 등의 내용을 다룬다. 반구대 암각화와
독보적獨步的 권영해 놀랍구나이렇게 느린 것이 하나의 생애일 수 있다니 리허설 없는 그의 삶은늘 실험적이다한없이 진보進步하려고 하나보수步守할 수밖에 없는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스펙이 된다 진정한 슬로우라이프,그의 결심에는 진부함이 없다 독특한 발걸음마다 디테일한 질주 본능이 느껴진다 나아가려 할수록 지키고 싶은그의 마음은 늘진보적 보수保守이다 아방가르드(avant-garde)한 그의 행보이것이 바로 독보적! 나무늘보는 지금 기량이 절정이다 △권영해 시인: 1997년 '현대시문학' 등단. 울산문인협회 회장. 시집 '
특급열차장선희수천억 물방울 바퀴가 굴러간다/꼬마 아이 신발도 싣고/연푸른 나뭇잎도 싣고/섬진강은 달렸다/자갈 위를 달리고 모래 위를 달리고/굽이굽이 달려도/급정거하는 법이 없다/역마다 바람과 구름을 태우고/신바람이 나면 꼬막과 굴은 무료 승차다/창밖이 물속이고 물속이 창밖인 섬진강/출렁다리 지나 구례역에서 잠시 정차한다/매표소는 산수유나무/가지마다 노란 열차표를 매달고/인심 좋게 두서너 장 나눠 준다(중략)레일이 없어도 달릴 수 있는 양털구름/재첩 소쿠리 만들어 보이면/굴렁쇠도 매화 꽃가지에 올라탄다/팔뚝 굵은 섬진강, 특급물고기가
빗방울문송산동그라미 저리도 그려대는 까닭은변변한 실반지 하나끼워주지 못한 게 못내 걸려서다동그라미 저리도 지워대는 까닭은 변변한 실반지 하나 받아보지 못한 게 못내 섧어서다제 손으로 부쉈다가 다시 그리는 집착의 수레바퀴차마 하늘도 외면하지 못해수수만 개 실반지 언약속삭이는 사랑동그라미 그려대기 지친 빗방울△문송산: 1981~1983년 '시문학' 2회 추천완료 등단(문덕수, 이석 추천). 시집 '보이는 것은 모두 젖는다' '주치의 A씨와의 관계' '바람의 향기' '편지&
어느 저물 무렵일 것이다안성길몸 아픈지 여러 해어느 해 저물 무렵내 안 어딘가 서로 부딪혀 금 간 틈으로해금 같은 물소리 새어 나오는 듯했는데그때 내 눈길에 마주친사물들은 오래고 낡은 옛날일에 지친 어머니 몸에서 번져 나오던비리고 아릿한 냄새 풍기며해금처럼 함께 우는 게 아닌가자꾸만 먹먹해진 나는인적 없는 비상계단차곡차곡 발끝에 쌓아 올리며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에한참을 그러고 섰다그때부터였을 것이다눈에 들어온 모든 게 짠하고서러운 속 감춘 게 보였을 것이다지천명이 다 이울도록이 별에 온 이유 찾지 못하고벌써 아무 일에나 눈시울 붉어
꽃살문성선경기도가 얼마나 깊으면 꽃이 되나? 간절한 염원의 마음 엮고 엮어서눈길을 두는 곳마다 꽃으로 피었나니 꽃세상이 곧 만다라다기도가 얼마나 쌓여야 꽃이 되나?기원의 문마다 꽃이라니기도의 끝에 맺힌 저 한 떨기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기도가 얼마나 간절하면 저렇게시들지 않는 꽃이 되나?세상을 향해 열린 문다 환하다.△성선경: 1960년 경남 창녕 출생. 1988년
수라(修羅)*엄계옥시인이 되고 보니 알겠다큰 것보다 작고 세세한 것여리고 힘없는 것에더 마음이 간다는 것을꼿꼿하던 고개사방 면벽보다발아래를 더 챙긴다내가 머리 위에벼락을 이고 살 듯내 발아래 수수만 년 무수한 생명들무지막지한 발목을 이고 찰나를 산다내가 잠깐 한눈 판 사이무지몽매한 내 발목 스친 자리개미 한 마리무너진 어깨 일으켜 세우느라안간힘을 쓴다머리 위에 임금 없고발아래 신하 없는 게 시인이라나는 그 앞에 무릎 끓고무너진 개미 일으켜 세우느라안간힘을 쓴다*백석 시에서 빌려옴.△엄계옥: 2011 '유심' 신인상.
역(逆)방향으로 더 깊이이자영시간이 촉박해 역방향 KTX를 탄 건참 잘한 짓이다이제부터 나는 점점 목적지와 멀어질 것이다 길이 아닌 곳을 배포좋게 갈 것이다어질어질 멀미 같은 설렘으로 거꾸로 거꾸로 거슬러가면 철로변 어디쯤에서 내 지난날을 증언하는 중년의 침목(枕木)하나 만날 것이다 녹슨 바람의 허리를 떠받치며 서럽도록 애틋한 개망초의 생애를 주절거릴 것이다 세월 곳곳 들를 곳 많은 나의 기차는수없는 정차를 되풀이하다가 더욱 더 아득히 아득히 도착지 없는 출발을 향해 속력을 낸다△이자영 시인: 1984년 제34회 개천예술제 문학신인
한 켤레의 구두*손택수 구두가 아니라 발을 벗어놓았다가죽은 발이 빠져나간 뒤에도 부르튼 발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해진 가죽 위에 앉은 먼지들은 소멸을 이야기하는 듯하다아마도 타박이는 저 먼지들이 체액에 젖은 구두 가죽 속으로 스며들어 까맣게 뭉친 빛을 내는 것이리라 바람도 눈보라도 들판도 가죽의 살갗 속으로 들어와 어느새 그들을 닮은 발을 바람벽처럼 안아주고 있는 것이리라 세족식이라도 하듯 지상으로 내려온 노을빛이무쇠솥에 데운 물처럼 발을 품어주고 있다 발톱이 돌조각 같았던 사람무덤구덩이 속처럼 컴컴한 구두에 발을 집어넣는다 발등 위
미안하다조덕자 어쩌다 한 번씩내게로 오는 소식들이 옛집으로 배달되고는 한다몇 번의 계절이 지나갔는데도아직도 이사했다는 말들이 세상 속으로 덜 걸어 다녔나보다그러다 보니 더러는 몇 달이 지나서 내게 오기도 한다보낸 사람 따뜻한 마음 아랑곳없이 옛집 우편함 속에 갇혀어쩌면 내 손길 기다리다 지쳤는지도 모른다마감이 한참 지난 원고 청탁서나맑은 물 위에 뜬 언어들이 가득한 시집을 뒤늦게 받고 보면보낸 사람 마음을 무시한 것 같아 나 또한 무참함에 발이 저린다미안하다고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나와서내 삶 속에 묻혀 살다 보니 내가 살아온
훈수 손경숙 한 길을 고집했다 하여전문가라 칭할 수는 없을 터이다 부풀려진 허명을 믿고 찾아온 내방자에세월 따라 불어난 내 노파심이알맹이 없는 훈수를 늘어놓고 말았으니 행여 키 높이를 감안하지 않고너무 높은 등주를 제시하지는 않았는지 그의 몇 마디 찬사에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잘난 체하는 마음이 요동치며 일어났던 것을 △손경숙: '문학예술' 수필, 시 부문 신인상. 수필집 '해를 끌어올리다' 시집 '대숲에 이는 바람' '낙화에도 뜻이 있다'. 울산중구문학회 이사. 울산수필가협회
급급하다 송은숙 사각형 돌들을 박아 만든 주차장돌과 돌 사이마다 풀이잔디며 둑새풀이며 마디풀 같은 것이 빼곡하다살고자 하는 것들 저리 허공 휘저어 그어 놓은 눈금초록 분필로 그린 모눈종이 같다빈틈없이 급급하다땅을 고르고 돌을 놓을 때 어느 싹은온몸 노랗게 되도록 벽을 긁다가색을 거두고, 줄기를 거두고한 점으로 오그라들어 깊이 단단해졌다빛의 기억을 품고 지그시 어둠을 견뎠다종일 내린 봄비가 햇살처럼 흘러넘칠 때기억은 풍선처럼 부풀어옆으로 옆으로 먼 길을 돌아 터져 나온다돌과 돌 사이는 빈틈없이 급급하다 △송은숙: 2004년 '
신차 출고 마경덕 카 캐리어가 차를 업고 지나간다이층에 둘, 아래층 하나, 차 넉 대가 한 몸이 되어 달린다갓 출고된 소나타 아반테 베르나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한 신차들삶은 연습이 없다는 걸 모르는 초보들덩치 큰 차에 업혀 어디론가 가는 중이다신호등에 읽힌 사거리가 풀어지는 동안높은 곳에 얹혀 으스대는 초보들기운차고 매끈한 온몸에 광택이 흐른다세상으로 나온 초행길, 한 번도 들이받은 적 없는 헤드라이트는 호기심에 반짝인다어미 등처럼 편안한 저 등은 처음이자 마지막딱 한 번 업히는 호강은 차를 만든 사람들의 마지막 사랑이다태클로 발을
멀리서 오는 生 박주하 사무치게 걸었다 파묻히지 않으려고길들은 여전히 정처 없고 미련은 악착같이 밤을 쌓아 놓았다어떻게 그 많은 생각을 품고 살았을까꼬깃꼬깃 접힌 낯선 마음들이모두 나의 것이라니생이 점점 무거워진다 봄바람을 쪼개어다시 이곳에 온다면 그때는아주 작은 풀꽃으로 피어야지길가 어느 모퉁이에서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부끄럼도 없이 그대를 기다려야지그때는 마음이 아니라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워야지단 한 번 다정한 눈빛만으로도 행복해야지 △박주하: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996년 '불교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흥덕왕릉 가는 길 심수향 수많은 그림자 밟고 가야왕릉이다뒤틀린 붉은 소나무헝클어진 그림자밟을 때마다소리치며 부서진다 마주할 수 없는 진실이거나견딜 수 없어 거듭한 외면이여기까지 왔을까본래 자리 놓치고그림자만혼란스런 육신 곁에 남아 있다 나무에게는몸이 마음이라면그림자는 말이다그 말 아리도록 절실하여밟고 서 있는내가 더 아프다 왕릉은 반달같이볕 바라기하고 있는데한 발자국앞장서 가는 그림자오늘은 나보다 더솔직하다 △심수향: 2003 '시사사' 신인상. 200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중심'
기형奇形의 손 제인자 영취산 오르다 늙은 상수리나무를 만났네둥치로부터 편편히 내민 나무의 손너럭바위 떠받친 손을 보네 가랑잎 내려놓고 가을을 닫은실한 열매를 추억하는 삼동三冬의 손등거칠거칠한 세월의 문장을 만져보네 말없이 말하는 손의 내력작달막한 어머니 관절마다 불거진갈고리손, 갈수록 펴지지 않는 육신에 비해 너무 커다란 손이었네 상수리나무 살 속으로 숨쉬는 줄 모르고산비알 버젓이 걸터앉은나는 우악스런 바위였네 너럭바위 거머쥔 기형의 손못박인 그 손바닥 도무지 펼 수 없었네 △ 제인자 시인: 경남 마산 진동 출생. 2005년 문예운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이규리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 새끼들 부리에 넣어줄 때 한 마리씩 차례대로 새끼는 새끼대로노란 주둥이를 찢어질 듯 벌리고 기다릴 때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노랑이나 목숨은 입구가 단단하여 절명이 그렇게 온다면 입을 벌리고 한 생각만 집중한 채 그렇다면 한 생을 정확하게 전달했는가 나는 ▲ 이규리: 199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뒷모습'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산문집 '시의 인기척' '돌려주
생, 이대로 굉장하다*김성춘 바람 부는 날 경주 아랫시장 여여심如如心보살 만나러 간다 막걸리 집에서 막걸리 마시다 일어선다 나이가 드니 모두가 친구다 대릉원의 까치도, 어제 만난 옛 기왓장도, 게이트 볼 친구 팔순의 김영감도 친구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고 준비할 것은 미리 준비할 줄 안다는 것, 세월도 풀잎도 슬픔도 모든 것은 다 떠나가는 것, 모든 것이 물거품 같고 수수께끼 같고 눈물 같다 수수께끼 같아서 살아 볼만한 오늘이고 내일은 분명히 오고, 오늘의 물소리는 오늘의 물소리다 점쟁이 집 문을 연다 뭐 하
이슬의 생애박종해나는 온몸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나의 온몸에 삼라만상을 단고 산다.그래서 온몸으로 세상을 본다.풀여치나 방아깨비 같은 작은 미물까지모두 잠든 밤에도나는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세상을 본다.이렇게 작은 풀잎 위에 집을 짓고하루 밤을 천년 세월처럼 지내다가신의 말씀으로 빚은 해오름이 되면나는 미련 없이 이 곳을 떠나야 한다.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겨우 한 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풀잎의 집에서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이렇게 간단한 삶의 한 때를 천년을 살다갈 듯이 서로 상처 주며고통과 고뇌를 내 몸속에 새기며 살아오다
그 섬 거문도 최경선 곱발 디디면 바다가 보이는 고만고만한 돌담 집이거나 얼기설기 묶인 지붕 너머 바다의 정수리가 훤히 보이거나 몇 발짝 골목을 나서면 시푸른 바다로 통하는 곳이다 혀 둥글게 말고 턱 빠지게 하품하며 느릿느릿 걷는 고양이 폼이 적나라하게 고요를 느끼게 하는 곳 저 혼자 불 밝히는 등대가 있고 전설처럼 *신지께가 어부를 지켜주는 곳손끝 유달리 까매도 부끄러울 것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온몸으로 바람을 막고 온몸으로 바람을 받아들이는 곳하늘과 바다가 허락해야 닿을 수 있는 바로 그 섬 어야디야 어기야 디야어쩌다 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