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바람이 매섭다. 마른 가루같이 햇살 흩어지고 비닐조각 날리는 12월의 오후는 더 짧아졌다.우체국 앞 건널목, 바람이 모로 비껴 걷는 나를 밀치고 앞장 서 간다. 바람이 스쳐 간 건널목 끝 붕어빵집 앞에 사람이 몇 보인다. 추운 날의 공식 같은 붕어빵 간판이 잠시 쉬었다 가라, 손 좀 녹이고 가라 내게 손짓하는 것 같다. 먼저 온 사람 몇이 찬바람 속에 발을 동동거리며 붕어빵을 향해 서 있다. 나도 모르게 그 앞에 섰다. 옆에 선 이와 마주 보고 씩 웃는다. 조금은 멋쩍고 조금은 공감되는 추억을 간직한 이들만의
식자재마다 독특한 맛이 있다. 어떤 것은 신맛, 어떤 것은 단맛, 어떤 것은 쓴맛, 매운맛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땡초다. 청양초가 점잖은 이름을 두고 땡초로 통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사람의 특징에 별명이 따라붙듯, 별칭을 지어 부를 정도로 뭔가 별난 게 있다는 얘기다. 일반 고추와 땡초는 매운맛에서 차이가 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만의 독특한 매운맛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음식에는 짭조름, 칼칼한 맛이 생명이다. 한데 급변하는 세상만큼이나 음식 맛도 이전과 같지 않다. 나라 간의 문턱이 낮아져 외부와 교류가 잦아진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마주치는 두 사람이 있다. 그들과의 인연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나는 집과 직장이 선암호수공원을 사이에 두고 있어 매일 걸어서 다닌다. 20여 분의 비교적 짧은 거리라 운동 삼아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늘 푸르고 잔잔한 호수에는 대자연과 호흡하는 물 병아리, 청둥오리 떼들이 평화롭게 유영하여 일상에 지친 산책객들에게 심신의 휴식을 안겨 준다. 양옆에 즐비한 조팝나무에는 앙증맞은 박새들이 저마다 존재를 알리듯 분주하다. 기슭 야산에는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상쾌한 공기를 뿜어주어 청정 공원으로 자리매김한 지
밥은 생존의 근간을 이루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이 진리 앞에 우리는 한 없이 나약해지기도 하고 비굴해지기도 한다. 밥을 벌기 위해 누구는 도둑질을 하고 누구는 연기를 한다. 배고파 우는 아이의 분유 값을 얻기 위해 절도를 했다거나 배가 고파 감옥으로 가려고 일부러 도둑질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밥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하고도 남음직하다. 몇 년 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중앙사원을 둘러본 후 해자를 건너고 있을 때였다. 아이를 가로로 안은 맨발의 여인이 울면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내달렸다.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곤궁한 삶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나마 문학에 힘을 기대어 풀뿌리 같은 생을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내겐 그렇게 보였다. 이미 한 시대를 거슬러 살고 있는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부모들의 세대가 떠나고 남은 이들은 이국땅에서 발붙이고 살기 위해 나름대로 바지런하다. 길거리에 매달린 간판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한글과 한자의 비중이 조선족의 인구 밀도가 줄어들면서 덩달아 한글 사이즈도 축소되고 있었다. 다행히 어디를 가든 대부분 우리말이 통했다. 유독 애원조로 말하는 조선족
매서운 바람이 우는 사자 같다. 기온이 올겨울 정점(頂點)을 찍을 기세다. 동해로 1월 마중을 나가는 새벽, 가로수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고 있다. 세상의 생물체 가운데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건 나무라고 한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중력을 거슬러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자신을 온전히 비워냈다. 겹겹이 껴입었던 잎들을 훌훌 벗어던졌다. 앙상한 옹이마저 드러낸 모습이 정직해 보인다. 벌레 먹은 몸으로 꽃도 피웠고 열매도 거두었다. 그것을 그저 숙명과 소명으로 여기며 받아들이고 이루어냈다. 지난 일들을 자랑하거나 낙
옛날 조선 후기 인천 부둣가엔 초선이란 기녀가 살았는데 유달리 담바고 즉 담배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기방에선 담배를 '초선이 기둥서방'이라 애칭하기도 했다. 그래 그런지 기방과 연관된 낭만적인 옛이야기엔 담배가 빠지지 않는다. 이후 일제 강점기 1931년에 나온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를 위시한 여러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사랑채와 대문채의 머슴방 묘사에도 담배는 단골로 나오곤 한다. 이와 같은 저간의 친밀도 때문에 그 심각한 폐해가 널리 알려진 요즘까지도 기성세대의 상당수는 여전히 흡연에 매우 너그럽
달력의 계절이 왔다. 세밑이라 불리는 이때쯤이면 은행이나 약국 같은 데서 달력을 마련해두고 손님들에게 가져가게 하는데, 나도 단골 약국에서 달력을 하나 얻어가지고 왔다. 이제 이 달력 하나로 한해의 대소사와 모든 약속이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다. 동그라미, 세모, 혹은 별 모양으로. 한 장 남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건 뒤 그 위에 다시 가벼워진 올해 달력을 건다. 새 달력은 세상에 선보이기 전의 갓난아기처럼 잠시 포대기에 싸여 있는 것 같다. 시간의 추가 기우뚱, 아래로 기운다.어렸을 때는 달력이 아주 귀했다. 처음 본 건
오랜만에 어머니와 외가를 찾았다. 교통이 편리해져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인데도 외조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찾을 기회가 없었다.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첩첩 산골짜기는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 군데군데 도심의 손길로 회색빛 공장들이 이방인처럼 서 있어 낯설기만 하다. 그림 같았던 마을은 떠밀려온 도시의 파편들로 인해 몰라보게 변해간다. 썰매를 타고 놀던 개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주차장으로 단장되었고, 상여가 있던 움막 자리에는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그 뒤편으로 돌담을 쌓고 있던 외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휑하
배에 오르지 않았다. 차마 승선할 수 없었다. 그들은 출항을 앞두고 단연 놀랐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쪼록 평안을 빈다는 눈빛들이었다. 나는 의구심만 가득 남긴 채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이 돌아오면 함께 떠나지 못한 심정을 고해야 할 의무가 마음 한 켠을 짓눌렀지만 여객선터미널을 나서는 발길이 마냥 가벼웠다. 한 모임에서 계획한 다비드섬 투어였다. 다비드,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상 중 하나이기도 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 다윗을 히브리어로 지칭하는 이름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솔로몬의 아버지인 다비드가 어린 목동이었
외진 내산의 봉화마을에 있는 저수지는 숲길을 몇 굽이나 돌아야 볼 수 있다. 남해에 그런 외지고 깊은 곳이 있을까 싶은데 넓은 저수지는 발 딛고 선 이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잠깐 동안 잊게 만든다. 작은 미술관 이름이 바람 흔적이다. 바람개비가 넓은 저수지의 품에 안긴 채 돌고 있다. 앵강만을 지키는 어머니처럼…잔잔한 수면과는 달리 바람개비는 비를 머금고 돌아간다. 사람 사는 것이 잠깐 스쳐 가는 바람의 흔적 같은 것이라면 좋으련만 무던히 애쓰고 노력하고 보듬어 안아야만 그나마 다치지 않고 바람개비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가게 된
시중에 떠도는 말에 '친절사'란 말이 있다. 요즘같이 빠듯한 세상에 동료나 고객의 사적 편의까지 살펴주는 회사원이나 운전기사 등을 가리킨다고 한다. '친절사', 아무리 많이 들어도 기분이 마냥 좋아질 것 같다. 사전에는 태도가 매우 친근하고 다정한 경우를 '친절(親切)'이라 이른다. 몇 년 전 문해교사 연수에 강사로 오신 교수님께서 인간관계에 관한 강의 말미에 "업무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가전제품 서비스센터 직원처럼 친절해지는 그날까지 노력합시다"라며 주먹을 불끈 쥐고 흔드시던 모습이 꽤
십일월이다. 가을이 살짝 모자를 들어 올리며 작별을 고하고 겨울이 외투 자락을 펄럭이며 다가오는 달이다. 상강을 지난 날씨는 갑자기 싸늘해지고, 해가 짧아져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앞세워 집에 돌아오면서 다시 한번 중얼거려본다. 십일월이네. 벌써, 어느덧, 이제, 어느새 십일월이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기분. 시월엔 카톡에 간간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같은 가을에 대한 노래들이 올라오더니 십일월엔 그마저 침묵이다. 십일월의 노래는 어디로 갔나. 그러고 보니 아침마다 노래하던 뒷산의 새들도 이제 지저귀지 않는다.
일자리 추천이 들어왔다. 오래전에 손을 놓았던 미용 일을 다시 시작하려니 설렘보다 걱정이 앞섰다. 변화된 생활이 활력이 되었을까. 그동안 잠재돼 있던 감각들이 살아나면서 일에 재미가 붙었다. 종일 서 있어도 지칠 줄 몰랐다. 컷 하나에 분위기가 바뀌고, 염색, 코팅으로 얼굴 톤이 부드러워진 고객을 대할 때면 마술을 부린 듯 기분이 좋았다. 환경미화원 아저씨의 땀에 절어 쉰내 나는 머리카락을 만져도 싫지 않았고, 등에 난 혹 때문에 스타일 바꾸는 건 물론이고 샴푸 하기가 쉽지 않은 아주머니에게도 피붙이처럼 살갑게 굴었다.고객 만족이
수능일이 코앞에 닥쳤다. 이맘때쯤 예비 수능생이나 그 가족은 공부에 몰두한 만큼의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온 신경을 수능 일에 맞춰 놓고 기도를 올리는 심정이리라. 과목별 교사가 전하는 요점은 물론 시험을 먼저 치러 본 선배들의 경험담과 정보까지 온통 수능 생각으로 꽉 차 있을 것이다.그렇듯 간절한 마음을 이용해 장사하다가 사회의 지탄을 받았던 명문대생들이 기억난다. 작년 이맘때였다. 대입 수험생들의 합격에 대한 간곡한 마음을 돈벌이로 기획해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명문대생이 쓰던 필기구와 직접 쓴 응원 편
팔순의 시누님과 '카톡'을 시작한 지가 반년쯤 된다. 남편의 칠순잔치 초대장을 휴대전화로 가족들에게 발송했다. 금방 "카톡" 하고 성급한 답이 왔다. 남편의 남매 중 최고령인 둘째 시누님이 참석하시겠다는 답장이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린다는 말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다는 답신을 드렸다. 그 후로 좋은 정보와 시누님의 일상 중 일부를 종종 톡으로 보내신다. 열의가 대단하시다. 새로운 것을 익히는 일은 젊은 사람도 귀찮아하는데 적지 않은 연세에 휴대전화의 다양한 기능을 익혀 활용하시다니 놀랍기만 하다. 톡을 주고받은
해 질 무렵, 길을 잃었다. 버스로 몇 정거장을 지나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이 느껴졌다. 지도를 보니 숙소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로마 시내를 들락거렸으니 그새 이력이 붙어 자신 있게 버스를 탔는데, 도로를 건너서 타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어차피 이 75번 노선에 숙소가 속해있는 동네가 있으니 계속 가다 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어 다섯 손가락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는 버스가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종점이었다. 그대로 있으면 시내로 다시 돌아갈까, 숙소
춤은 매력적이다. 춤을 추기 시작하면 경직된 몸과 마음이 일순간에 허물어진다. 일상의 불편함도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간다. 대책 없이 춤은 사람을 빠져들게 한다.춤이 좋다. 그렇다고 춤꾼은 아니다. 잠깐 춤을 배우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나가는 호기심이라 여겨진다. 내심 그 길로 가지 않았음에 스스로 다행이다 싶다. 전문가의 길로 가기에는 내가 가진 끼가 모자랐다. 그저 흥이 나면 리듬에 맞춰 내 마음대로 춤을 추는 것으로 족하다. 전문가가 되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가끔 춤을 출 때가 있다. 아주 짧거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작은 것이라 되뇌는 순간 대략 서너 가지가 필자 뇌리에 '반짝' 스쳐 지나간다. 앞의 둘은 책이고 나머지는 몽당연필과 농소3동 도서관 등이다.가장 먼저는 독일 태생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가 1973년에 출간한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다. 실천적 경제학, 환경운동 등에 생을 투신했던 그는 이 책을 통해 인간 중심의 경제를 주창했는데, 그 고갱이는, 아무리 물질적 풍요가 약속된 경제 성장지상주의라도 그 추진과정에서 환경과 인간성이 파괴된다면, 인류에겐 백해무익할
추석이라고 집에 온 아이들에게 콩밥을 해주니 "또 콩밥이에요?" 하며 시큰둥한 반응이다. 객지에서 끼니나 제대로 챙기나 싶어 영양을 고려해 마련한 밥이 저항에 부딪힌 것이다. "콩이 얼마나 몸에 좋은데" 해묵은 비책의 말을 꺼내 드니 이내 잠잠해져서 콩밥을 잘 먹고, 후식으로 강낭콩 가루로 속을 넣은 송편도 두엇 집어 든다, 어릴 때라면 좀 더 까탈을 부렸을텐데 나이가 드니 저희 입맛도 순해진 것인지 어미의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물론 나도 콩밥을 좋아하진 않는다. 몸에 좋다니 되도록 지어 먹으려는 것이지 어릴 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