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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재에서 바라본 울산의 야경. ⓒ이상원
간월재에서 바라본 울산의 야경. ⓒ이상원
간월산의 아침. ⓒ이상원
간월산의 아침. ⓒ이상원
신불평원에서 바라본 영축산. ⓒ이상원
신불평원에서 바라본 영축산. ⓒ이상원
재약산 억새. ⓒ이상원
재약산 억새. ⓒ이상원
천황산에서 바라본 영남알프스 연봉(連峯). ⓒ이상원
천황산에서 바라본 영남알프스 연봉(連峯). ⓒ이상원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이 계절에 최적의 여행지로는 영남알프스가 아닐까 싶다. 영남알프스는 울주군, 밀양시, 양산시, 청도군, 경주시에 걸쳐 해발 1,000m 이상의 9개의 산군으로 이루어진 수려한 산세와 풍광이 유럽의 알프스와 견줄만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가지산(1,241m), 간월산(1,069m), 신불산(1,159m), 영축산(1,081m), 천황산(1,189m), 재약산(1,108m), 운문산(1,188m), 고헌산(1,0341m), 문복산(1,015m) 등이며, 그 중에서 가지산, 신불산, 재약산(천황산 포함), 운문산은 산림청이 선정한 남한 100대 명산에 속한다.

  신불산과 영축산 사이의 신불평원에 약 60만여 평, 간월산과 신불산 사이의 간월재에 약 10만여 평, 고헌산 정상 부근에 약 20만여 평의 억새 군락지가 있고, 특히 재약산과 천황산 동쪽의 사자평에 약 125만여 평의 억새 군락이 형성돼 있어 국내 최대로 알려져 있다.

  태극 모양의 약 30km에 이르는 길을 5개 구간(억새바람길, 단조산성길, 사자평억새길, 단풍사색길, 달오름길)으로 나눠 조성된 하늘억새길은 어느 길을 가더라도 억새와 함께 빼어난 풍경을 볼 수 있다. 코스도 다양하고 등산로와 안내표지도 잘 정비되어 있어 체력과 시간에 맞게 산행과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50년 전의 추억을 소환해본다. 내가 졸업한 울주군 상북면의 상북중학교는 3학년 마지막 소풍으로 밀양 표충사까지 걸어서 1박 2일로 가는 것이 전통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11월에 각 동네마다 친구들끼리 모여 가장 빠른 고갯길을 넘어 배내고개에 집결해 사자평을 지나 표충사까지 갔다가 이튿날 다시 그 길을 되돌아오는 코스였다. 들판을 뛰어 다니고 산에서 뒹굴며 자란 시골 아이들이라 해도 그 길은 중학생에겐 태산준령이었다.

  그런데도 소풍을 갔던 남녀 학생 어느 누구도 낙오하지 않았고, 어느 학부모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반세기가 지나 그때의 까까머리 소년의 머리에 흰머리가 내려앉고, 이마에 주름살이 새겨졌지만 지금도 그 힘든 길을 거뜬히 다녀온 것이 스스로 대견하고, 아련한 추억이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사자평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스키장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았는데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스키장 건설은 무산 되었고, 그 평원의 초지가 목장엔 적지라 목장이 들어섰다. 사료가 수입되면서 소들은 산을 내려갔고 목장은 문을 닫았다. 그 뒤 각지에 흩어져 있던 화전민들이 모여들었고, 화전민들은 겨울이면 억새를 태워 고사리와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고 가축을 길렀다.

  사자평 소유주인 표충사와 주민들과의 법정 다툼 끝에 주민들은 떠나야 했고…, 오늘날 광활한 억새밭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화전민의 자녀 교육을 위해 세워진 학교가 밀양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 일명 ‘고사리학교’였다. 교실 한 칸에 선생님 한 분, 전교생 몇 명이 전부였던 그 ‘하늘 아래 첫학교’는 주민들이 떠나면서 문을 닫았고, 학교의 건물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엔 ‘1966년 4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이라는 글이 적힌 교적비만 남아 있다.

  아득한 옛날 가을소풍 때 잠시 들렀던 그 고사리학교 앞에서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을 지금도 낡은 앨범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요즈음의 부모도 아이들을 믿고 자연 속에서 모험과 다양한 체험을 하게 하면 아이들이 훨씬 건강하게 자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자랑할만한 추억이 있으면 살면서 고달플 때 힘이 되지 않겠는가.  

  억새의 천국, 사자평! 배내고개에서 능동산을 거처 가는 길, 얼음골케이블카를 타고 좀더 쉽게 가는 길,  표충사에서 오르는 길이 있는데 가보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 사자평을 품은 천황산과 재약산 정상에 서면 영남알프스의 준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람에 흔들리고 햇빛을 받아 빛나는 은빛 억새의 물결과 함께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광활한 파노라마 풍경은 힘겹게 산을 오른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표충사로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기암절벽과 여러 폭포도 장관이다.

  사자평은 신라시대 화랑도가 수련하던 곳이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킨 곳이기도 해서 좋은 기운이 서려있다.  해발 700~800m에 위치한 ‘재약산 산들늪 고산습지’는 약 17만 7천여평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산 습지이고, 다양한 희귀 동식물이 살고 있는 자연생태계의 보고이다.  2007년 꼭 보전해야 할 한국의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억새의 바다에서 산행을 즐기며 아찔한 긴장감도 함께 맛볼 수 있는 코스로는 단연 간월산과 간월재, 신불산과 신불평원, 영축산으로 이어진 능선을 빼놓을 수 없다. 옛날 밀양장꾼과 언양장꾼의 물물교환 장소였던 배내고개에서 시작해 배내봉을 거쳐 가는 길, 사슴목장 터에서 임도를 따라 오르는 길, 온천이 있는 등억리 영남알프스 복합웰컴센터에서 간월재나 신불산으로 오르는 길 등이 있다.

  이 능선을 걸으면 동쪽으로 깎아 지른 절벽 너머로 울산까지 조망할 수 있고 온 사방으로 억새 터널을 지나게 된다. 찾은 사람 모두에게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 나온다. 힘에 부치면 굳이 가파른 고개를 넘거나 먼 길을 가지 말고 억새밭 어느 한 곳에 몸을 묻고 쉬었다 오기면 해도 된다. 충분히 힐링을 할 수 있어 발품을 판 노고는 톡톡히 보상받을 수 있다. 

  억새는 하나로 피어 있을 땐 꽃으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떼를 지어 피어 있으면 세상의 어느 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된다. 세상에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고 비바람에 몸을 맡겨 흔들리지만 무리를 지어 계절이 바뀌어도 제 몸을 지키는 강인함은 여럿이 힘을 모아 혼탁한 세상을 바꾸는 민초(民草)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절경과 험한 산세 만큼이나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는 산이 신불산(神佛山)이다. 이름처럼 신령한 산이고, 은둔의 산이자 저항의 산이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활동한 빨치산은 지리산 다음으로 신불산이 두 번째 규모였다. 가명 남도부(南到釜), 실명 하준수는 인민군 중장으로 유격대 사령관이었고, 그가 이끄는 빨치산은 신불산 파래소폭포 위쪽 681고지(갈산고지)에 본부를 두고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경찰과 군인을 무수히 습격했고, 식량을 얻기 위해 수시로 마을로 내려와 가축과 식량을 약탈해갔다. 약탈한 물품에 대해 해방통일 후 백미로 환산하여 갚아 주겠다는 내용이 담긴 동해남부전구사령관 남도부의 직인이 찍힌 ‘빨치산 원호증’이라는 증명서를 발행해주기도 했다.

 인근 주민들은 밤에는 빨치산, 낮에는 경찰에게 시달리는 고달픈 시절을 보내야 했다. 1954년까지 이어진 신불산 빨치산 토벌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또 하나의 전쟁이었고, 아픈 민족사의 한 토막이었다. 석남사 입구 주차장에 ‘神佛山 공비토절작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신불산, 간월산 일대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대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운둔하여 신앙활동을 이어가던 곳이기도 했다. 1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천연동굴인 죽림굴은 천주교 공소로 이용된 천주교 성지이다. 그 죽림굴은 한때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곳으로 ‘울주 천주교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또한 영남알프스 일대는 호랑이와 표범이 많이 살았던 지역으로 간월재를 넘을 때는 7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인명과 가축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울주군이 2019년부터 산악관광 활성화를 위해 시작한 영남알프스 완등인증 사업이 성공을 거두어 해마다 참가자가 늘고 완등 도전을 위해 전국에서 산꾼들이 모여들고 있다. 휴대폰에 <영남알프스 완등인증> 앱을 설치하고 9개의 봉우리 정상 표지석과 얼굴 사진을 함께 찍어 등록하면 인증이 되고 기념품도 받을 수 있으니 한번쯤 도전해보면 삶의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단기간에 완등 인증 받으려는 조급함을 버리고 영남알프스의 풍경도 즐기고 그 빼어난 산세와 깊은 계곡 만큼이나 다양한 역사와 문화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산을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 보지 못한 야생화에도 눈길 한번 주면 좋지 않을까. 그 꽃이 화답을 하리니…

  유럽 알프스 외에 뉴질랜드, 일본, 중국에도 알프스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영남알프스가 억새로 유명하지만 어디 가을뿐이겠는가. 사계절 어느 때 가도 다양한 매력을 만나게 된다. 또 굳이 산 정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여러 산자락에서 명산의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다. 해마다 영남알프스 웰컴복합센터에서 열리는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시기에 맞춰 산행 후 온천과 함께 영화를 즐겨도 좋을 듯 하다. 

  19개 암자를 거느린 불보사찰 통도사, 국내 최대 비구니 교육 도량인 운문사, 아름드리 소나무 숲길과 계곡이 아름다운 석남사, 사명대사를 모신 호국사찰 표충사, 고요하고 아담한 고헌사 등 영남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사찰에 들러 약수 한 모금 마시고 속세의 시름을 살포시 내려 놓고 가기를…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았던 자수정 광산이 폐광된 후 멋진 관광지로 탈바꿈한 자수정동굴나라, 선사시대의 세계적인 유물인 국보 반구대암각화도 영남알프스 여행 리스트에 포함시키면 좋겠다. 거기에 언양 한우 불고기를 빼놓으면 섭섭할 것이다. 

이상원 사진가 swl5836@naver.com
이상원 사진가 swl5836@naver.com

  산에 간다고 뭐가 달라지느냐고 말하지 말라.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자연에게서 배우는 지혜는결코 만만치 않다. 산은 사람을 기른다. 힘든 산행을 마치면 몸은 힘들어도 정신은 맑아진다.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문제도 잠시 제쳐놓고 땀 흘리며 산을 올라 숨을 고르고 쉬엄쉬엄 능선을 걷다 보면 어느 새 저절로 풀리기도 한다. 남에게서 원인을 찾았던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황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을 보는 사나운 눈길은 부드러워지고, 사람을 대하는 모난 마음도 둥글어진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영남알프스 억새에게 길을 물어 보시라!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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