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벼가 익어가는 걸 보자 오래 전에 사진 촬영을 위해 가봤던 하동 평사리 들판이 떠올랐다. 그리고 30대에 읽었던 소설 ≪토지≫가 생각났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졌다. 누렇게 익은 벼가 베어지기 전에 그 황금빛 들판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먼저 위치가 높은 경남 하동 고소성에 올랐다가 높게 자란 나무가 들판을 가려서 다시 한산사(寒山寺) 언덕으로 내려왔다. 벼가 익어가는 평사리들(무딤이들)과 동정호, 부부 소나무, 섬진강, 평사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장면들을 파노라마 사진으로 찍었다. 날씨가 맑은 다른 날, 3시간 산행하며 지리산 성제봉(형제봉, 1112m)에서 새로운 절경을 만나 다시 사진을 찍었다.
소설 ≪토지≫의 기둥, 평사리!
지리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섬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83만여 평의 넓은 농토가 있고, 통영 출신의 박경리 작가가 경상도 방언을 풀어 놓을 수 있는 지역! 그곳이 바로 평사리였다.
2002년판 토지 전질 서문에 박경리 작가는 이렇게 썼다. “악양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 그 땅 서편인가? 골격이 굵은 지리산 한 자락이 들어와 있다.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이상향이다….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 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의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
박경리문학관 마당에 놓인 원고지 모양의 석판에는 ≪토지≫3부에 나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섬진강과 해란강이 왜 다를까 생각한다. 아름답기론 섬진강 편이다. 조촐한 여자같이, 청아한 소복의 과부같이, 백사(白沙)는 또 얼마나 청결하였는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박경리 작가는 딸과 함께 쌍계사 말사인 한산사(寒山寺) 대웅전의 탱화를 보기 위해 왔을 때 잠시 악양들판을 멀찍이 한번 보고 소설의 무대로 삼았을 뿐, 평사리를 처음 찾은 것은 소설 ≪토지≫가 완성되고 7년 뒤인 2001년 11월이라고 한다. 태어나지도 않았고, 한번 제대로 찾아와 본 적도 없는 평사리를 소설에서는 뛰어난 상상력으로 그리도 생생하게 풀어냈다니 실로 놀라웠다.
하동 박경리문학관과 최참판댁
박경리문학관은 최참판댁 옆에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지상 1층의 기와 한식 건물이다. 작가가 평소에 쓰고 아끼던 유품 41점과 여러 출판사에서 발행한 ≪토지≫의 전질, 주요 문학작품과 관련 자료,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품 중 작가가 가장 소중히 여긴 3가지는 <재봉틀>, <국어사전>, <나비장>이었다고 한다.
“<재봉틀>은 나의 생활, <국어사전>은 나의 문학, <나비장>은 고향 통영이 준 나의 예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최참판댁은 소설 ≪토지≫ 속의 가상공간을 현실화하여 조선시대 양반가를 재현하여 2001년 하동군에서 지은 전통가옥이다. 너른 마당에 10동의 건물이 짜임새 있게 들어서 있다. 최참판댁의 당주인 최치수가 머물던 ‘사랑채’, 서희가 거주하던 ‘별당채’, 윤씨 부인의 공간인 ‘안채’ 등에서 소설 속 인물들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주변엔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인 초가들이 정감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었다. 입구에는 실제 이곳에서 촬영된 영화와 드라마의 홍보판이 만들어져 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직전인 2019년 한 해에만 무료입장객을 제외하고 36만 9,176명이 입장료를 내고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하루 평균 약 1천 명이 이 외진 곳을 찾았다는 것은 우리 국민들의 작가 박경리와 ≪토지≫에 대한 높은 평가와 관심을 말해주는 지표이다. 특히 방문객 중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전국의 수많은 문학관 중 유례가 없는 일이다.
원주 박경리문학공원
원주시 단구동에 위치한 작가의 옛집을 중심으로 소설 ≪토지≫의 배경과 이미지를 재현하기 위해 ‘평사리마당’, ‘홍이동산’, ‘용두레벌’ 등으로 꾸며져 있다. 2010년 문을 연 <박경리문학의집>에는 각 층마다 테마를 가지고 박경리 작가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옆에는 쉼터 북카페도 있다.
이곳의 옛집에서 1980년부터 1998년까지 살면서 원주시내에 한번 나가지 않고 ≪토지≫ 4부와 5부를 집필했다. 이곳에 있던 텃밭에서 충실하게 농사를 지으며 생명사상을 실천한 곳이기도 하다. 누가 가장 기쁠 때가 언제냐고 물어오면 “내가 키운 고추를 잘 말려서 꼭지를 딸 때”라고 말했다고 한다.
후배 소설가 박완서가 1988년 남편과 아들을 연달아 잃고 하느님조차 부인하며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박경리는 이곳의 집으로 박완서를 불러 보듬어주며 함께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밤새 끓인 맛있는 국과 따뜻한 밥을 대접하며, “글을 써야 이겨낼 수 있다”고 다독였고, 그때 박완서는 일어설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 20년 뒤 박완서는 박경리 장례식 때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햇살이 서쪽으로 한참 기운 시간, 나뭇잎이 조금씩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엄마 손 잡고 이곳을 찾아온 어린 두 아이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 자청해서 그 엄마의 휴대폰으로 가족사진을 찍어 주었다.
한 때 이 집은 한국토지공사가 주관한 원주단관(단구동·관설동)지구 택지개발사업에 포함돼 헐릴 뻔 했으나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보존되게 되었고, 3,170평의 문학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원주 토지문화관
원주시내 단구동에 있는 작가의 집이 택지지구로 개발되면서 받은 받은 보상금 등을 모아 1999년 원주 외곽 흥업면 매지리 산 아래에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사전 신청과 심사를 거쳐 작가와 예술인들에게 무료로 창작공간과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박경리 작가 생전에 그러했듯이 텃밭에서 유기농으로 직접 키운 채소들이 반찬으로 만들어진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창작공간 <귀래관> 앞 넓은 텃밭에는 고추, 무, 배추, 파, 콩, 상추…등 갖가지 밭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박경리 작가가 1999년부터 생애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은 작가의 일상생활의 흔적과 삶을 보여주는 <박경리 뮤지엄>으로 꾸며져 ‘작가 박경리’의 모습과 ‘인간 박경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통영 박경리기념관과 묘소
박경리 작가의 묘소가 궁금하여 통영을 찾았다. 박경리기념관은 휴관일이라 보지 못하고 그 옆의안내 표지판을 따라 한참을 걸어 미륵산 자락에 있는 묘소에 닿았다. 양지바르고 산짐승들이 함께 사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평범한 묘지 앞에는 아무 글씨도 새기지 않은 상석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엔 참배객들이 놓아둔 솔방울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도 솔방울 하나를 얹고 인사를 드렸다. 묘소 앞 남쪽으로는 평소 작가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 이순신이 임진왜란 초기 당포해전(1592년 6월초)에서 싸워 이긴 당포(唐浦,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바다와 한산도가 보였다.
2004년 11월, 반세기만에 엄청난 환대를 받으며 고향 통영을 방문했다. 그 뒤 2007년 11월, 81번째 생일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양지농장(펜션)에 머물렀다. 그곳을 가꾼 검찰 고위직 출신의 정창훈(1920~2012) 변호사는 평소 박경리 작가의 작품을 전부 섭렵한 애독자였다. 그 인연으로 평소 본인이 유택으로 마련해둔 땅을 박경리 선생을 위해 조건 없이 희사함으로써 선생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다. 묘소 가는 길 입구에 통영시민의 뜻을 모아 세운 돌비석을 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 탐욕이 넘쳐나는 세상에 가진 자의 진정한 품격을 보는 것이어서 머리가 숙여졌다.
박경리(1926~2008), 그리고 소설 ≪토지≫
1955년 소설가 김동리가 본명인 <박금이>가 아닌 <박경리>란 필명으로 당사자 모르게 단편소설 ≪계산≫을 현대문학에 싣고, 이듬해 ≪흑흑백백≫을 추천하여 문단에 등단했다. 그 뒤 ≪불신시대≫, ≪표류도≫,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누구나 알듯이 <박경리>와 ≪토지≫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토지≫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1969년 9월 <현대문학>에 ≪토지≫ 1부 연재를 시작으로 여러 매체에 연재되었고, 문화일보에 ≪토지≫ 5부를 연재하여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에 다음의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끝)
장장 25년의 집필 기간, 원고지 31,200장(쌓으면 4.5m, 아파트 1층 반의 높이), 등장인물 600명! 1897년 한가위(8월 15일)부터 1945년 8월 15일(광복)까지 약 50년 간 하동 평사리와 간도, 서울, 일본 등을 넘나들며 한(恨)에 절은 민초들의 삶의 이야기가 개울과 강이 되어 대해(大海)로 나아가 드디어 대하소설 ≪토지≫가 탄생했다.
6.25 전쟁 때 남편의 실종, 그 뒤 9살 아들의 죽음, 암 투병, 사위 김지하의 긴 감방생활…등 숱한 역경을 글을 쓰며 견뎌내고, 세속적인 것과 스스로 차단하며, 유방암 수술을 받고 붕대를 감고서도, 외손자 원보(김지하 시인의 아들)을 업고 썼던 결과였다. 작가는 “≪토지≫ 는 비극이면서도 축복이다”, “생명에 대한 연민이 이 소설을 쓰게 했다”, “내 삶이 문학이고, 문학이 내 삶이다”…라고 했다.
소설가 조해일은 ≪토지≫를 일컬어 “나는 중화학공장 몇 백 개보다 ≪토지≫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세금으로도 생산해낼 수 없는 것이 예술작품이다. ≪토지≫가 올려준 것은 우리 정신의 GNP이다”라고 평가했다. 1996년 호암아트홀에서 호암상 예술부문을 수상했는데 그 시상의 이유로, “≪토지≫는 단순한 문학사적 성취를 넘어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화와 정신의 자산을 풍요롭게 한 광복 50년 최대의 기념비라 해야 옳다. 우리도 이제 세계를 향해 한국에도 ≪토지≫라는 문학작품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토지≫에 대한 찬사는 참으로 다양하다. ‘한민족의 바이블!’,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자 봉우리!’, “한(恨)의 미학’, ‘생명의 존중’을 담아 600명의 등장인물과 더불어 펼쳐지는 대서사시!”……
≪토지≫는 프랑스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독일어로도 번역되었고,.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러시아 국립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는 박경리 작가 동상이 세워져 있다. ≪토지≫가 완간된 지 거의 30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고, 원고지에 필사하는 애독자도 많다고 한다.
우연히 하동 평사리의 가을 풍경을 촬영하러 갔다가 박경리 선생과 소설≪토지≫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 으로 이어져 행복했다. <박경리>라는 정신적 지주와 우리 문학의 최고봉 ≪토지≫를 가슴에 품을 수 있어 올해의 가을은 유난히 풍성하다. 박경리 작가 동상들에 새겨진, 작가의 시에서 딴 문구를 되뇌어 본다.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박경리 묘소 가는 길에서 만난 시 하나가 내 머리를 세게 쳐서 아직도 얼얼하다.
목에 힘주다 보면/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혹 생긴 연유를 모르고/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 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 박경리 작가의 시 <우리들의 시간> -
. 이상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