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카즈벡산 등반
거대한 바위산, 마치 달마대사처럼 세상을 다 초월한 듯 웃고 있는 모습이다. 국경을 스스로 자처하며 우뚝 솟은 고봉준령에 가슴이 확 트인다. 산 입구에 핀 자잘한 봄꽃 향기가 운무처럼 일렁인다. 저 건너편 산정은 눈부신 고립처럼 설산의 빙하로 우뚝 솟았다. 변화무쌍한 세상의 춘하추동을 부러워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만의 곧은 성정을 스스로 지키며 가는 성자 같다. 

해발 5,047m 카즈벡산. 조지아 사람들은 '얼음산'이라는 뜻으로 '하얀 신부'라고도 부르며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가 형벌을 받던 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서원 제공
해발 5,047m 카즈벡산. 조지아 사람들은 '얼음산'이라는 뜻으로 '하얀 신부'라고도 부르며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가 형벌을 받던 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서원 제공

아름다운 얼굴 다 보여주지 않는 면사포 쓴 신부의 자태
나는 지금 저 산을 오르려 한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하여 마치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듯하다.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2,000m의 지점에 섰다. 이제 겨우 사건의 전개 정도만 읽은 듯한데 숨은 벌써 턱까지 차오르고 있다. 주인공이 누구더라? 등장인물은 또 누구였더라? 음미하며 가늠할 만한 여유라곤 주어지지 않는다. 저만치 솟은 교회가 풀꽃보다 작아졌다. 숨이 거칠어지고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일직선이 되어 그저 앞사람의 등만 좇는다. 

 검은 독수리 몇 마리가 마른하늘을 휘감아 돌고 있다. 이 높은 곳에 무슨 먹잇감이 있기에 저리 배회하고 있는가. 두 날개를 펴 활공하는 우아하고 늠름한 자태가 마치 주인공의 결말을 미리 보여주려는 복선 같아 다시 우러르게 된다. 여기 사람들은 '얼음산'이라는 뜻으로 '하얀 신부'라고도 부르는 5,047m의 카즈벡산(Mount Kazbek)이다. 신부가 면사포를 쓴 듯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얼굴을 다 보여주지 않는 야릇한 베일의 여인처럼 이 산이 꼭 그렇다. 우리를 오라는 듯, 아니 오라는 듯 숨은 뜻의 깊이를 가늠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해발 5,047m 카즈벡산. 조지아 사람들은 '얼음산'이라는 뜻으로 '하얀 신부'라고도 부르며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가 형벌을 받던 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서원 제공
해발 5,047m 카즈벡산. 조지아 사람들은 '얼음산'이라는 뜻으로 '하얀 신부'라고도 부르며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가 형벌을 받던 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서원 제공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 앞에 5000m 고봉준령 중턱서 발 묶여
모두가 지쳐갈 즈음 첫 휴식이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간식을 먹으며 인사를 나눈다. 그러나 나는 저만치 혼자 서서 이 산에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인간에게 불과 지혜를 선물하고 그 죄로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에게는 고마운 존재다. 제우스는 그를 제압해 만년설인 이곳 바위산에 쇠사슬로 결박시켜 300~400년을 고립시켜 버렸다. 이후 독수리에 의해 매일 간을 쪼아 먹혔다. 낮에 쪼아 먹힌 간은 밤이면 다시 회복 돼 또 독수리에게 먹히고…. 무한 반복의 고통을 견디면서까지 인류를 사랑한 프로메테우스. 그의 강한 정신력과 곧은 성품을 어쩌면 이곳 조지아인들이 닮지 않았을까 싶다. 역사 이래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평화를 수호하며 지금까지 나라를 지키고 있으니 말이다. 누구나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준비가 되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막상 고통 앞에 부닥치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너지는 게 나약한 인간임을 누가 모르랴. 아낌없이 준다는 건 자신을 부인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거룩한 본질임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본다.

 해발 5,000m가 넘는 산중 겨우 중턱쯤 지나고 있다. 서사의 절반도 아직 펼치지 못했는데 맑고 푸르던 하늘은 금방 구름과 바람이 휘몰아치며 눈을 흩뿌린다. 저만치 알티헛(Altihut) 산장이 일행을 반긴다. "그래 파먹을 테면 파먹어라."는 듯, 다 내어주고도 다시 살아난 프로메테우스처럼 고도 3,014m에서 우리들의 길라잡이가 되어주고 있는 산장이 너무도 반갑다.

 세계 각지에서 온 이들이 빵을 뜯어 먹으며 서로 인사를 나눈다. 주변에 동양인은 나 혼자다. 이방인 같아 쓸쓸하지만 개의치 않으려 억지로 더 다가선다. 폴란드 친구가 "내일은 저곳을 오를 수 있겠지요?"라며 산장지기에게 묻지만, 실상은 그 누구도 모른다. 

카즈벡산 등반·주타 트레킹에 나선 필자. 이서원 제공
카즈벡산 등반·주타 트레킹에 나선 필자. 이서원 제공

산장지기 경고 듣고 올라왔던 길 향해 다시 재촉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을 건너고 있다. "신은 문을 만들었고, 인간은 창을 만들었다"는 어느 시처럼 안과 밖, 창의 경계로 지금 온도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홀로 깨어 창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간절한 내일의 날씨를 기도하고 있다. 바람 소리가 세차게 요동친다. 문은 미동도 않은 채 더 굳건하지만 창과 문의 미묘한 차이가 신과 인간의 관계인가 싶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이 되어도 하늘은 검고 시계(視界)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위를 보아도 정상이 어디쯤인지 모르겠다. 천상과 천하의 가운데 끼어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라니. 클라이맥스로 넘어가는 책의 모퉁이처럼 폭풍전야가 이런 것일까. 모두가 하늘만 쳐다보며 침묵에 빠졌다. 스페인에서 온 친구는 혼자라도 오를 기세다. 배낭을 더 조이고 신발 끈을 묶는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게 자연이다. 하얀 수염이 눈부신 산장지기는 모두 하산을 하란다. 더 오르다간 목숨이 위험하다며 경고를 한다. 모두가 무언의 눈빛으로 동의를 한 듯 이쯤에서 돌아서기로 했다.

 저기가 정상인데도 정복의 의미가 무색하다. 달마의 흐릿한 미소가 눈발 속에 감추어진 채 "나 여기 있으니 걱정 말아라." 라며 우리를 위무하는 듯하다. 듬성듬성 돋을새김한 활자같은 검은 바위를 비켜서며 하산이다. 

 결말이 궁금해 못 참겠다고 기어이 책장을 넘기는 무모함은 아집이자 불통임을 안다. 모두 올라왔던 길을 향해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눈이 때론 세상을 일순간 덮어버리듯 나도 책을 여기서 덮어야겠다. 여백의 미를 다소곳이 포개어 작은 돌 하나에 받쳐 둔 채 일행의 맨 뒤를 빠르게 따른다. 가다가 돌아보면 홀로 석상처럼 굳어질 것 같은 두려움을 가슴 깊이 꽁꽁 여민 채….

주타 트레킹

일반적으로 조지아의 트레킹 코스를 추천하라고 하면, 이곳 주타(Juta)와 더불어 트루소밸리(Trusso Valley), 우쉬굴리(Ushguli)를 최고로 이야기한다. 오늘은 그중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주타를 가려고 길을 나섰다. 물과 음료 빵 등만 간단히 챙겨 둘러메니 행장은 간소하다. 어제에 비할 바 못 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 가듯 휘파람을 불며 차에 올랐다. 

주타 마을 입구 십자가 세워진 바위.
주타 마을 입구 십자가 세워진 바위.

 20분 정도 차로 달리면 금방 아찔한 낭떠러지가 어깨 옆으로 같이 따라온다. 한순간만 방심하면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질 기세다. 굽이진 길을 가다가 목동이 몰고 있는 양 떼와 마주한다. 목동도 양도 차도 서로 탓하지 않는다. 조금 서 있으면 길은 통하기 마련인 듯 뽀얀 먼지를 날리며 비포장길을 다시 달렸다. 입구엔 몇 가구의 집이 있을 뿐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 요란하다. 손을 담그자 얼음장처럼 차갑다. 저 빙하의 설산이 녹아 흐르는 물이다. 계곡 가운데 커다란 둥근 바윗돌이 물길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으며, 그 바위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 이곳 사람들은 어디든 저렇게 종교적 신념을 표하는 신앙심이 있는 듯 보였다.

주타 트레킹을 하는 필자. 이서원 제공
주타 트레킹을 하는 필자. 이서원 제공

고산지대라도 전날 등산에 비하면 저절로 노래 나와
초입은 오르막이다.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호흡도 가쁘다. 20여 분 정도 오르면 금방 완만한 시골 오솔길처럼 수월해진다. 이름 모를 풀꽃들이 천지로 피어 아침 바다 위의 윤슬처럼 눈부시다. 무릎을 꿇고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은은한 향기가 차가운 눈바람조차 물리치게 한다. 작은 도랑에도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이 노래를 부르며 꽃의 배경이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뒤를 돌아보는 것조차 잊었구나 싶어 그때야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아! 황홀경에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저 봉우리들이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빛나고 있었다. 이제 막 돋기 시작한 푸른 초원에는 겨울을 버틴 말, 양, 소가 기분 좋게 가파른 능선을 서로 나눠 풀을 뜯고 있다. 

몇 가구의 집이 있을 뿐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더 요란한 주타 마을 입구.
몇 가구의 집이 있을 뿐 세차게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더 요란한 주타 마을 입구.

중년의 계절은 여름 끝자락 가을 초입 '바비레따'
저절로 노래가 나온다. 바람을 가르며 무릎까지 차오른 눈길을 헤친다. 혼자라면 어때, 이런 곳에 산다면 어떤 근심도 욕심도 없을 것만 같다. 부질없다 할지라도 언젠가 이곳에서 그냥 조그마한 집 한 채로 지내고 싶다는 소망 하나 살며시 품어 보았다.

 얼마나 올랐을까. 산 가운데 초원, 그 위로 소 등처럼 오목하게 솟은 집 한 채가 보인다. 호텔 피프트 시즌(Fifth Season)이다. 바로 '다섯 번째 계절'을 뜻하는 말이다. 이곳에서는 여름 끝 무렵부터 초가을로 들어서는 시기인 약 2주간 정도의 계절을 일컫는 말로 '바비레따'라고도 한다. 사람으로 보면 최고 아름다운 중년의 나이인 52~54세 정도다. 이때 중년 사람에게 "당신은 지금 바비레따의 계절을 살고 있군요"라고 인사를 건낸단다. 잠시 쉴 겸 초원에 놓인 해먹에 누웠다. 파란 하늘, 흰 구름, 일렁이는 바람 그리고 설산의 풍경이 조화를 이룬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인생의 꼭 피프트 시즌을 지나고 있구나. 다시 본다. 살아온 날, 살아갈 날, 그 어디에도 다시 없을 이날, 숨 가쁘게 헤쳐온 길들이 겹쳐 갈래가 얽힌다. 

주타 마을 사방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풀꽃들. 이서원 제공
주타 마을 사방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풀꽃들. 이서원 제공

 뒤따라오던 타일랜드 가족은 벌써 저만치 앞서 오르고 있다. 보통은 2,500m에 있는 차우키(Chaukhi) 호수까지 갖다 돌아오는 게 일반적이다. 거기서 간식을 먹고 사진을 찍거나 음악을 들으며 물빛에 자신을 반추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도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다시 어제처럼 돌아서기로 한다. 높이 솟은 조지아 깃발이 손을 흔들 듯 몽환적으로 펄럭인다. 데칼코마니같이 앞뒤로 치솟은 설산은 이쯤에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싶다. 

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누구는 말을 타고, 어떤 이는 스틱을 짚으며 안간힘으로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가고 있다. 나도 몇 년 전까지 저랬을 것이다. 24시간의 교대 근무로 낮과 밤, 주말, 공휴일도 잊은 채 일만 좇았다. 주어진 것을 그때 하지 못하면 스스로 용납 못하는 성격 탓에 신경성은 더욱 깊어 갔다. 옥죄어왔던 일상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았다. 조금씩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벌여놓는 일이 많아질수록 그게 최선인 것처럼 살았다. 그러나 여기 서서 알겠다. 쇠똥구리가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듯, 지금 소똥을 굴리면서라도 제 길을 바르게 가는 게 아름답다는 것을. 이서원 시조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