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 약 440km 거리에 있는 메스티아.&nbsp;이서원 제공<br>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 약 440km 거리에 있는 메스티아. 이서원 제공

사람이 행복하려면, 돈이나 명예, 그도 아니면 권력이 필요충분조건일까? 주어진 일상에서 조금 비켜 바람과 하늘을 마주하며 무아지경의 황홀한 시간을 갖는 걸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만, 나는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랬기에 지금 이 2000미터의 고도를 넘어가면서 창을 열고 호흡을 가다듬는 일에도 멈출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이 있잖은가.

주그디디서 6시간 달려 메스티아로

조지아의 서쪽 도시 스바네티주의 주도인 주그디디Zugdidi를 지나 메스티아Mestia로 향한다. 대게의 경우 조지아를 열흘 정도 여행을 온다면 이곳은 일정에서 빠지는 게 기본이다. 수도 트빌리시에 약 440km 거리에 있어 하루 종일 달려도 이곳에 도착하기란 쉽지 않다. 그만큼 교통편과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여행객들은 주로 밤 기차를 이용하거나 중간 소도시에서 하루쯤 머물다 이틀이 걸려 도착한다. 뽀얀 먼지를 날리며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산을 오르내리기는 기본, 협곡의 물살은 굉음을 내는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온 산을 휘감은 채 인구리댐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할까. 이 길이 맞기는 한 걸까. 간혹 길옆으로 드문드문 집 한 채씩 보이긴 해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늘 선택 앞에서 하나를 정할 때는 기준이 있다. 어느 게 내 환경에 가장 적정한가를 두고 고민하기 마련이다.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해야만 할 때, 미련과 아쉬움이 늘 마음 한쪽을 짓누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작년엔 메스티아를 포기하고 바투미를 선택했다. 그것은 단지 학창 시절 지도에서 보았던 가장 단순한 흑해의 이미지만을 믿고 유턴을 했다. 다시 1년 후, 이곳 주그디디를 지나며 늘 선택의 최선을 통해 후회하지 않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음에 감사하다. 나는 다시 왔고, 안 가본 길에 대한 동경으로 지금 열심히 달려가고 있다. 어차피 처음부터 포기를 한 게 아니라 잠시 접어두었을 뿐이었다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거룩한 여정인가.

 배고픈 것도 잊은 채 종일 달리고 달린다. 수백 미터의 낭떠러지쯤은 이제 겁도 나지 않는다. 6시간쯤 달렸을까. 마침내 저만치 언덕 아래로 작은 도시가 보인다. 바로 산속의 요새 같은 메스티아다. 타달타달 먼지를 연기처럼 내뿜은 채 산모롱이를 돌자 영화의 한 컷이 바뀌듯 불쑥 나타난 이곳은 정말 왈칵 눈물이 핑그르르 돌만큼 반갑고 고맙다. 그래, 드디어 왔구나.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인가. 긴장이 풀려서인가. 온몸에 힘이 쭉 빠지자 그만 길거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외부와는 철저히 단절된 채 자기들의 민족만으로 구성된 어느 행성의 작은 소읍 같지만 스바네티Svaneti 지역의 주요 거점 도시가 바로 이곳이며,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의 한 지방이기도 하다.

코쉬키는 탑형으로 집집마다 가지고 있으며 전쟁때 가족들의 피난처가 됐다. 이서원 제공<br>
코쉬키는 탑형으로 집집마다 가지고 있으며 전쟁때 가족들의 피난처가 됐다. 이서원 제공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의 한 지방

모든 것이 일순간 멈춘 듯이 정지된 세상, 21세기의 화려한 문명과는 조금 동떨어진 채 100년 전쯤 거슬러 과거로 회귀할 줄 알았다. 그러나 상상과는 사뭇 다르게 어느새 물질문명의 확산으로 이미 변화의 물결 중심에 서 있는 듯하다. 카페, 호텔, 레스토랑, 심지어 슈퍼까지 현대식 건물로 빼곡하다. 서로 다른 언어의 여행객들이 쏟아내는 사람 소리, 강물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힙합의 음악처럼 뒤섞여 나는 다시 이방인의 외로운 사람으로 동그마니 움츠러들고 만다.

 첫날밤을 보내고 날이 밝았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다. 무작정 차를 운전하여 산을 올랐다. 그런데 이건 길이 아니다. 완전 TV에서만 보았던 오프로드Off-road다. 누군가 먼저 간 흔적을 따라 그저 죽음을 담보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더듬으며 가는 것과 다름 아니다. 차를 세울 수도 돌아설 수도 없다. 만약 위에서 내려오는 차가 있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제발 갓길 하나만이라도 나와준다면 그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갈 거라고 수없이 되뇐다. 그러나 내 간청은 허사였으며 아기 걸음마처럼 엉금엉금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그렇게 30분 이상을 올랐을까. 드디어 작은 빈 터가 나오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차를 세운다. 진퇴양난! 아, 여기서 그 뜻을 실감할 줄이야.

 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걷는 게 이토록 행복한가 싶다. 그제야 눈을 들어 저 산을 우러른다. 바로 십자가 전망대가 손에 닿을 듯 다가온다. 전망대라고 하기엔 조금은 엉성한 우리나라의 과수원 원두막 같지만, 모두가 이곳에 올라 방금 떠나온 메스티아의 도시를 조망한다. 손톱보다 작은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하나의 풍경을 연출한다. 집집마다 탑형을 한 주택이 그저 성스러운 보배 같다. 물을 마시며 세계에서 온 이들과 인사를 나눈다. 하나같이 젊은 청춘의 남녀들이 싱싱하고 푸른 이 계절의 주인공 같아 스스럼없이 악수를 한다. 그래, 지금 이곳에서 만난 게 얼마나 큰 축복이며 살아있음에 감사한 일인가. 어떤 이는 여기서 하산을 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땀을 식힌 후 곧장 길을 나선다.

코룰디호수의반영.&nbsp;이서원 제공<br>
코룰디호수의반영. 이서원 제공

2700m 트레킹 명소 코롤디 호수

무릎에 온 힘을 주며 산정을 향해 두어 시간을 걷는다. 걷다가 지치면 잠깐씩 바라보는 무아지경의 설산을 가슴에 품는 일은 덤이다. 풀꽃의 향기는 온 산을 덧칠하는 화가의 붓놀림처럼 찰랑찰랑 형형색색으로 내 콧등을 자극한다. 이대로 여기서 살 수 있을까. 저만치 오두막 한 채가 나타난다. 주저 없이 문을 두드린다. 키 큰 삼촌 같은 인상 좋은 아저씨가 문을 열어준다. 작은 카페다. 만국의 음료수인 콜라를 하나 산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찍어줄 수 있느냐니 흔쾌히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란다. 앵글 속 뾰족한 바위의 우쉬바산(4710m)이 내 뒤로 성큼 다가와 서 준다.

 3시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2700미터에 도착했다. 작은 호수, 아니 연못, 아니다, 웅덩이다. 그러나 이곳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룰디 호수Koruldi Lakes라니 조금은 실망이다. 하지만 수많은 여행객이 여기로 트레킹을 온다. 그만큼 배경이 아름답다. 나 역시 호수 앞에 선다. 저 먼 산의 반영에 풍덩! 찬란함에 빠진다. 그 사이 하늘이 일순간 어둠으로 덮어진다. 여행은 날씨가 성패를 좌우한다고 하더니 빈말이 아니다. 그토록 온화했던 내면 뒤에 은닉한 고요를 재끼고 포효하듯 제 역동성을 들어낸다. 서둘러 사진 몇 장을 찍는 게 고작이다. 무엇을 둘러보고 감상에 젖어볼 겨를이 없다. 금방 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여기까지 4륜 택시를 타고 온 사람들은 순식간에 차를 타고 떠났다. 모두가 사라지고 혼자 남는다. 한 번쯤은 같이 차를 타겠느냐며 물어주지도 않은 채 가버린 매정한 기사와 여행객들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다. 인정머리라고는 일절 없다며 혼자 주먹질이라도 날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두려움과 공포감, 이곳에 버려진 듯한 외톨이, 정녕 여행자가 오롯이 느껴야 할 몫이던가.

우쉬바산을 배경으로 필자. 이서원 제공<br>
우쉬바산을 배경으로 필자. 이서원 제공

 그렇게 비에 젖은 몰골로 흙투성이 황톳길을 반은 걷고 반은 뛰고, 시야가 가려진 채 퍼붓는 비속을 뚫고 십자가 전망대만 나타나길 바랄 뿐이다. 얼마나 올라왔던지 가도 가도 앞과 뒤는 변함없이 그대로인 듯 제자리걸음만 같다. 꿈속에서 악마에게 쫓겨 그렇게 뛰어도 나아가지 않던 발걸음이 여기서 또 하필 만나게 될 줄이야.

 올라올 때는 여기서 죽어도 좋을 만큼 그렇게 아름답던 풀꽃과, 저 산봉우리의 능선도 비속에 몸을 숨기니 당장이라도 요술을 부려 저 아래 도시로 풀쩍 뛰어내리고 싶다. 이 얼마나 간사한가, 인간이라는 나약함이 마치 풀꽃에 앉은 이슬보다 나을 게 없으니.

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살아가는 거, 절절한 이유도, 확고부동한 목표도 없이 저 번개처럼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게 인생인데도 떠날 수 없는 수만 가지 이유에 갇혀 지내지 않았던가. 마침내 오늘, 이 대자연에 서니 하등 중요하지도 않은 일 앞에서 마치 그게 내 생명과도 바꿀 수 없으리만치 몰두했음에 부끄럽다. 산은, 이 날씨는 저 하늘 아래서 거부도 저항도 하지 않는다. 받아들이는 포용, 그 너머에 있는 소멸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더딘 걸음을 통해 오래도록 생각의 갈피를 정리해 보라는 듯, 흙 묻은 천근의 신발에 그저 경의를 표해야 할까. 지극히 당연한 이치 앞에서 섭리를 몰랐던 자신을 탓하며 걷고 또 걷는다. 이서원 시조시인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