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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남부의 아스핀자 근교 에루셸리산의 측면에 동굴을 내 만든 수도원 바르지아 전경. 이서원 제공
조지아의 남부의 아스핀자 근교 에루셸리산의 측면에 동굴을 내 만든 수도원 바르지아 전경. 이서원 제공

고리에서 약 190㎞ 떨어진 바르지아는 조지아의 남부의 아스핀자 근교 에루셸리산의 측면에 동굴을 낸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일몰이 너무나 예쁜 이름도 생소한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낼까. 아니면, 그냥 평범하지만 의미 있는 도시로 가 볼까. 두 갈래에서 마음이 서성거렸다. 늘 선택은 자신의 몫이지만 거리와 시간 등 일정 앞에서 고민했다. 전날 잠을 잘 청하지 못했던 터라 아침에 일어난 내 상태는 그야말로 10라운드 이상 뛴 복싱 선수의 헝클어진 몰골 같았다. 그냥 상대를 끌어안고 더는 버틸 수 없으니 차라리 링 밖의 코치를 향해 흰 수건을 던져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던 마음이라고나 할까. 

12세기 튀르크인 침략 대비해 만들어 비밀통로 접근했던 곳
며칠 안 깎은 수염은 더부룩했고, 머리는 벌써 하얗게 뿌리가 눈 뭉치처럼 쌓이고 있었다. 갑자기 그냥 어느 동네 느티나무 아래서 여름 볕을 피해 쉬고 싶었다. 꼭 가야만 될 곳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 보면 후회할 것 같은 이 사이에서 저울질했다.

 아침 볕은 우리나라보다 더 뜨겁게 열기를 뿜고 있었다. 그래, 또 언제 오랴!. TKO를 당하더라도 다시 두 주먹에 힘을 불끈 쥐었다. 무슨 거대한 파이터를 만나러 갈 것도 아니면서 이리도 요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날꼬. 주섬주섬 짐을 챙겨 다시 차에 올랐다. 

 신을 향한 간절한 믿음의 사도들은 언제나 내면의 갈등보다 하늘을 향해 오롯이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에 기꺼이 헌신하지 않았겠나. 그래, 가보자. 믿음의 시원을 찾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바르지아로 향했다. 

동굴 내부 기도처. 이서원 제공
동굴 내부 기도처. 이서원 제공

길 잃은 어린 타마르 여왕 찾는 외침에
시골을 달린다. 차창을 열고 뜨거운 열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이쯤은 즐기자며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길이지만 덜컹거리며 먼지 날리는 비포장 길을 언제 달려보랴 싶었다. 두어 시간을 달렸을까 잠이 와락 쏟아졌다. 작은 동네 어귀에 차를 세우고 눈을 감았다. 30분을 잤을까. 느티나무의 푸른 바람이 솔솔 아이스크림 맛처럼 달큰했다. 기운이 상쾌하다. 다시 액셀을 밟으며 신나게 달렸다. 도로공사로 인해 갈수록 길은 험하고 최악이다. 저 뒤에서 엠블런스 소리가 요란하다. 이 좁은 1차선 도로를 어떻게 따로 비켜줄 수도 없고 무연한 듯 앞을 향해 엉금엉금 운전을 했다. 생사를 오가는 다급한 환자가 있나 싶어 신경은 쓰이지만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내 처지도 이해해 주겠지 싶었다. 점차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급기야 방송을 한다. 도대체 뭐라고 떠드는 거야? 알고 보니 병원 차가 아니라 경찰차다. 마침내 내 차를 추월하더니 급브레이크를 잡더니 다짜고짜 나에게 다가온다. 어쩌라고! 뭐라 뭐라 계속 떠든다, 난 코리아에서 왔다고 서로 동문서답을 했다. 내가 말을 못 알아듣는 거나 자기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거나 피차일반 아닌가.

"나 여기 있어요!"란 대답에서 지명 유래
그런데 기어이 내 국제면허증을 요구한다. 보여주니 스티커를 발부한다. 맙소사! 내 작은 눈이 갑자기 심 봉사 눈 떠지듯 휘둥그레졌다. 어이없다. 내가 무얼 위반했다는 건가? 바짝 깎은 내 엄지손톱을 한쪽 손으로 나도 모르게 마구 쥐어뜯고 있었다. 불안한 내 무의식중의 반응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변명할 그 어떤 통용어도 없다. 손만 계속 가로 저었지만 막무가내다. 겨우겨우 번역기를 돌려보니 차선위반이라고 한다. 이런 인간 같으니라고. 1차선 도로에 차선위반이 어딨다는 말인가. 그것도 도로공사 중이라 온통 먼지와 흙들이 채워져 추월도 못 하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이 시국에 말이야! 경찰은 내가 출국하기 전까지 은행에 가서 납부하라는 말을 남기고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휭하니 가 버렸다.

동굴 내 와인 저장 공간. 이서원 제공
동굴 내 와인 저장 공간. 이서원 제공

1293년 대지진으로 ⅔ 파괴된 후에야 모습 드러내
아마도 내가 외국이라고 자기들은 기죽지 않으려는 듯 끝까지 위반고지서를 주고 승전 장군처럼 위세 당당하게 군림하는 것 같아 괘씸했다. 가는 길마저 엉망진창인데 덥기는 더 덥다. 

 그래도 가 닿아야 할 곳이 있다. 이런 일도 있어야 여행의 묘미지. 그냥 스스로 위로하며 다시 길을 끝없이 달렸다. 광천수가 유명한 보르조미를 지나 드디어 목적지인 바르지아가 저만큼 보였다. 웅장한 바위산, 저 산을 깎아 절벽에 거대한 바윗덩이가 마치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주차하고 입장료를 구입했다. 조지아에 와서 처음으로 입장료를 냈다. 우리 돈 약 1,000원이다. 강변을 돌아 남부에 있는 고대 동굴 거주지, 기독교인인 이들은 모슬렘 튀르크인의 침입이 항상 두렵고 골칫거리였다. 이후, 오스만 제국 등의 침략에 대비해 1185년경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건설 당시에는 므트크바리강의 비밀 통로들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후, 몽골의 침략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이 동굴은 1293년 큰 지진에 그만 2/3가 파괴되었다. 이때 숨겨졌던 구역들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총 6개의 층층을 이루며 약 300개의 방과 5만 명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연회장, 마구간, 상점, 빵집, 계단씩 밭, 종교 시설 등이 있는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마을이라고 해야겠다. 

타마르여왕룸 내부 공간. 이서원 제공
타마르여왕룸 내부 공간. 이서원 제공

300개 방에서 최대 5만명까지 살았다 전해져
미로처럼 끝없이 이어진 동굴은 이 무더위에도 시원하고 아늑했다. 와인 양조 공간도 있고 우물도 있다. 동굴 교회는 촛불이 켜져 있고 수도사가 지금도 이곳에 거주하는 듯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조금은 새롭게 와 닿는다. 

 아버지 기오르기 3세 뒤를 이어 이 동굴 도시를 완성한 타마르(조지아 전성기를 이끈 여왕)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놀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때 삼촌이 애타게 찾으며 "타마르! 타마르!"를 부르자 "아크 바르지아(나 여기 있어요)"라고 해서 이곳 이름을 '바르지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 여기 있어요"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안심되는 말이 어디 있을까.

 

 그대 먼 마음 자락 두고 온 지 열 사나흘

 수도사의 흰 수염 같은 정오의 햇살 너머

 돌계단 밟아 오르는 종소리가 초록이네요

 

 까닭 모를 그리움이 강물처럼 출렁일 때

 새까만 제복 같은 어둠 홀로 침잠하고

 천지가 바윗덩이라도 쪽창 하나 새겨봅니다

 

 세상과 단절된 채 무덤 같은 침묵의 제단

 누구의 부름인가요. 귀를 가만 기울이면

 아득한 고립의 독백, 나 여기 있어요  

 

 - 졸시조 '나 여기 있어요' 전문

동굴 안에서 필자. 이서원 제공
동굴 안에서 필자. 이서원 제공

딱딱한 돌무덤 같은 곳에서 신과 소통을 얼마나 갈망했을지…
뜨거운 볕이 강물 소리보다 더 명징하게 쏟아지는 돌계단을 타박타박 밟아 올랐다. 저 아득한 푸른 나무 곁으로 오밀조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을 바라보며 이곳 은신처에서의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자신을 다그치며 신과의 소통을 갈망했을까. 거처를 위해 변변찮은 도구를 들고 숱한 날 동굴을 파며 지난한 자신과의 싸움을 견뎠을 조지아인들의 숭고한 정신이 위대하고 거룩해 보였다. 창 하나 없는, 오로지 딱딱한 돌무덤 같은 이곳에서 삶을 견디는 일은 어쩌면 이 생을 버리고 저 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함만이 저들의 전부였을 것 같았다. 

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날마다 무릎을 꿇는 일, 날마다 자신을 바치는 일은 오로지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하는 길임을 잘 알기에 더 마음 한쪽이 애련했다. 갑자기 보고 싶은 얼굴이 저 초록 이파리에 반짝이는 햇살처럼 떠올랐다. 나는 조용히 텅 빈 돌집에 걸터앉아 빛도 없는 어둑하고 오목한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 채 오래도록 눈을 감았다. 이서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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