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방어진 선창 디자인 거리 골목 끝트머리에서 발견한 비목다방. 정은영 제공
방어진 선창 디자인 거리 골목 끝트머리에서 발견한 비목다방. 정은영 제공
비목다방 들어가는 입구의 안내 문구. 정은영 제공
비목다방 들어가는 입구의 안내 문구. 정은영 제공
옛방파제 자리에 생긴 활어회센터. 정은영 제공
옛방파제 자리에 생긴 활어회센터. 정은영 제공
방파제에 붙어 있는 방어진 조선소. 정은영 제공
방파제에 붙어 있는 방어진 조선소. 정은영 제공

 

시작하면서

왜 하필 "비목일까" 

 울산 동해 끄트머리 방어진항 주변에서 다방으로 흔한 이름이 아니다. 왜 비목으로 다방 이름을 지었을까. 우리는 해마다 6.25가 발발한 6월이면 '비목'이라는 노래를 많이 듣게 된다. 

 전후 세대들은 사실 비목이란 낱말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다. 그냥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뭔지 모르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장 터가 떠오른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최근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벌이는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벌이고 있는 전쟁의 아비규환을 뉴스로 접하면서 우리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포성이 울리는 최전방 고지에서 적과 마주한 병사들의 깊은 고뇌를 생각해 본다.

 비목이라는 노래만큼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리게 한 전장 터 노래가 또 있을까 싶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터, 가끔 찾는 강원도 양구, 화천, 고성 등지의 최전방에서 말 없는 산야의 고요함에 전율한다. 저 고지에서 삶과 죽음이 한순간임을 처절히 느끼는 병사들의 고뇌에 저절로 숙연해진다. 

 2013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2년 전이다. 일없이 지내던 시월 어느 날 방어진 일대 다방을 취재하러 갔을 때 방파제 나가는 길목 어판장 근방에서 비목이란 이름을 단 다방을 보았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비목다방은 함부로 사용하기 쉽지 않은 이름이다. 의문을 가졌고 벅찬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쉽게도 그때는 방어진 선창의 약속다방을 비롯해 많은 다방 이야기를 한꺼번에 담아내야 해서 비목다방과 몇몇 다방은 두루뭉술하게 언급만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다시 써야지 했다. 이번에 기회가 왔다. 

 비목다방만을 별도로 "뚝" 떼어내서 쓰고자 했음을 밝힌다. 또 비목이란 노래 가사를 작사한 한명희 선생 이야기 일부는 카페 예술의 뜨락에서 일부 옮겨 싣는다. 

 

방어진과 비목다방

방어진과 비목다방, 시작하면서도 의문을 가졌지만, 이 두 개 낱말의 조합이 사실 잘 들어맞지 않는다. 한마디로 단박에 이해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방어진이 강원도 화천군이나 인제군 어디쯤, 최전방 철책선 근방 작은 마을이라면 당연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군인들의 도시라는 화천에 비목다방이 있다고 가정하면 이야기가 되고도 남는다. 그리고 그 비목다방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머리숱이 희끗희끗한 노병이 있고 이 다방에서 노병은 창 너머로 당시의 피비린내 진동했던 저 고지에서의 상흔을 떠올리며 한잔의 커피를 마시고 있다면 아마도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생뚱맞게 방어진 선창에 비목다방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수시로 어선들의 뱃고동이 울어대고 싱싱한 횟감이 즐비한 방어진 선창 디자인 거리 끄트머리에 비목다방이 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곤란하다. 지금은 주변이 많이 변했지만, 비목다방 앞은 과거 회를 썰어 팔았던 방파제로 나가는 길목 끝이다. 

 

다방 이름은 주인의 뜻이런가

울산에서 다방 하면 아직은 방어진이다. 방어진 초등학교 앞 종점다방에서 디자인 거리를 따라 비목다방까지 감나무에 감 열리듯 다방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원점다방, 제일 다방, 당신다방 등 10곳이 넘는다. 가히 전국 다방 성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다방들이 성업하고 있다. 

 다방 이름도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다방 이름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나름대로 주인의 정성이 가득 담겨있다. 어떤 다방은 최초 방어진다방에서 원점다방,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을 지어놓고 있다고 한다. 다방 이름이 바뀌는 것은 많은 사연이 있겠지만 크게는 주인이 바뀌었다는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디자인 거리를 돌아다니다 비목다방 간판을 처음으로 바라보는 순간, "어, 어, 어, 여기에 비목다방이 있네, 방어진이 한국전쟁 최전방인가"라고 반문했다. 비목이라는 이름은 사실 분위기가 무겁다. 그리고 비장함을 느끼게 한다. 다방 이름으로서는 선택이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비목다방이 방어진 디자인 거리 끄트머리에 있다는 것은 수학의 미적분처럼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비목다방에 가다

앞에 써놓은 것은 지난 2013년 이야기다. 지금부터는 현재 시점, 10년을 넘긴 2024년 이야기임을 먼저 적고 시작한다. 

 이 다방에 가는 날, 오늘따라 하늘이 파랗다. 눈이 시리다고 해야 하나, 파란 하늘은 손끝으로 튕기면 쨍하고 금이 갈 것 같다. 태화강 변 아산로를 따라 방어진으로 달렸다. 태화강 하류, 억새가 피었다 지는 2024년 11월 초순, 아침은 쌀쌀했으나 햇살이 퍼지자 약간 덥다.  

 다방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다가 옆길로 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잠시 2년 전 여름의 기억하나를 먼저 들추고 간다. 파란 하늘빛이 2023년 6월 30일과 7월 1일 1박 2일 울산불교문협이 강원도 양구와 인제, 고성의 사찰을 순례하던 때의 전방 하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날은 무더웠으나 하늘은 오늘처럼 맑았다. 함께 순례 갔던 사람들은 6월 하늘이 가을하늘 같다고 했다. 

 당시 우리는 양구에서 박수근 미술관을, 인제에서는 만해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설악산 백담사와 고성 금강산 건봉사를 순례했다. 모두가 최전방지역이었다. 건봉사는 철책선 안에 있는 사찰이다. 만약 이런 전방지역 어느 장터 마을에 비목다방이 있었다면 당연히 들어가 봤을 것 같다. 

 박수근 미술관은 양구읍 가운데에 있다. 양구읍을 빙 둘러싼 지역이 펀치볼이라는데 한국전 당시 수많은 군인이 산화했던 전장 터라는 생각에 함께 갔던 사람들은 어느새 노래 '비목'을 부르고 있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되어 쌓였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방어진 회 센터 주차장에 주차했다. 디자인 거리 끄트머리, 코너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비목다방은 2층, 1층은 방앗간이었다. 

이 다방에서 커피 한 잔 

오전 10시를 살짝 넘긴 시간이라 다방이 문을 열었을지가 걱정이었다. 시내 다방들은 오전 10시가 기본 문 여는 시간이다. 어떤 다방은 점심 먹고 오후가 돼야 문을 여는 곳도 있다. 시간도 때울 겸 해서 먼저 방어진 조선소가 있는 방파제를 한 바퀴 돌았다. 과거 방어진 조선은 방어진 철공 조선이라고 했다. 세월이 철공이라는 낱말을 낙엽처럼 떨궈 버렸다. 방파제에서 방어진 일대를 둘러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방파제를 돌아 나와 드디어 비목다방에 갔다.

 2층 계단을 올라가면서 비목다방을 새긴 유리창 선팅이 오래됐다는 생각을 했다. 근래 다방들은 한결같이 돈을 들이지 않는다. 돈 들여봤자 그만큼 장사가 안되면 본전 생각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자하지 않는 것은 사장님들의 나이도 무시하지 못한다. 대부분 다방 사장님들은 노년층이 많다. 젊은 다방 주인은 울산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도 보기 드물다. 언제까지 다방을 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시설에 대한 투자는 최소화하는 것이다. 

 알고보니 이 다방은 오전 9시 전에 문을 연다. 다방 실내는 깔끔했다. 그리고 바다로 향한 창문은 열려있다. 주인 혼자 앉아서 TV 뉴스를 보다가 일어섰다. 뉴스 자막은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어떻고, 저떻고" 매우 심각하다. 누가 암놈인지 수놈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이 전쟁이다. 결국은 이기는 쪽 이야기가 역사로 등장하고 진 쪽은 전설이 되는 것일 뿐이다. 

 주인과 둘 뿐인 다방에서 디자인 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사장님! 커피 한 잔 주이소" 하고 사장님을 불렀다. 커피는 한잔에 3천 원이다. 

 커피를 빨리 달라는 것은 일찌감치 혼자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어서 "사장님도 같이 한 잔 하입시더" 했다. 이 말은 오늘 내가 마수걸이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재수가 좋으시라"라는 손님의 깊은 뜻이 담겼다.

 그녀는 즉시 화답했다. "고맙습니다. 일찍 방어진은 우짠 일입니꺼"

 "바람도 고요하고 해서 방파제에 나가면 싱싱한 횟감 좀 구할랑가 싶어서 왔더니 고기가 없네요" 하고 에둘러 됐다.

 사장님은 요즘 바다에 고기가 없다고 했다. 비목다방 앞집도 배를 갖고 있는데 부부가 나가서 고기를 잡는다는 것이다. 선원을 고용하면 나가는 순간부터 손해라고 했다. 드디어 그녀와 이야기 물꼬를 튼 셈이다. 

 주인은 방어진에서 보라다방을 운영하다 다방 건물이 주차장 부지가 되어 헐리는 바람에 6년 전 비목다방을 인수했다고 한다. 그녀는 비목다방이 최소 30년은 넘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이 건물 지으면서 다방이 들어섰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물주인은 1층 방앗간 집이라고 했다. 또 이 건물주인이 인심이 좋은 분이라고 했다.  

 그녀는 방어진에서 오랫동안 다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진 다방들 돌아가는 이야기는 거의 알고 있다고 했다. 이미 문을 닫은 약속다방 등 방어진 어느 다방이 어떻게 돼서 문을 닫았는지도 훤했다. 비목다방은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와 의자가 있다. 규모가 크지는 않는 편이다. 방어진항 주변의 다방들이 모두 이 정도로 고만고만하다. 비목다방은 부두와 디지안 거리 방향으로 큰 창문이 있어서 자연 채광으로도 밝았으며 공기 순환이 잘 되는 바람에 지난여름 무더위에도 에어컨을 가동한 일이 없다고 했다.   

정은영 작가
정은영 작가

 

 왜 비목다방으로 이름을 지었는지 아느냐고 했더니 사장님은 아무 생각 없이 "모르지요. 왜 이리 고상한 이름을 지었는지" 무덤덤하게 말했다. 비목에 대한 여러 상념이 한순간 파도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그의 흘러온 삶의 한 부문을 무너트렸다. 들어보면 자신은 1999년 12월 울산에 왔다. 처음에는 노래방을 하다가 다방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나이도 있고 해서 자녀들이 하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그냥 해오던 일이라서 아침이면 습관처럼 문을 연다고 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