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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 늘 편안함을 느낀 내가 어떻게 이 먼 낯선 땅 조지아에 왔을까. 그것도 세 번씩이나 찾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세상에 수많은 나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3년을 계속 온다는 것도, 어쩌면 익숙함에 의한 여행이었을까.

러시아로부터 독립 후 아제르바이잔과 국경 분쟁
사실 이제 와 말하지만, 조지아에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 있다. H 선교사님의 소개로 O 형제와 J 자매를 소개받은 게 4년 전이었다. 그들은 젊은 신혼부부로 아제르바이잔 출신이다. 갑작스럽게 러시아에서 분리 독립된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과 국경 분쟁이 발생했고 급기야 부모님은 아제르바이잔에, 자기들은 조지아 땅으로 편입된 가발Gabal 지역에 살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6·25전쟁 이후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듯이 이곳에서도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부부다. 물론 서로 왕래는 할 수 있지만 육로는 막혀있고 비행기로만 가능하다. 비싼 항공료가 없으니 당연히 이들은 부모님을 뵐 기회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연휴로 이들에게 나는 매달 약간의 후원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3년 전 느닷없이 이들이 보고 싶었다. 그들은 꼭 나를 초대하고 싶다고 몇 번씩이나 소식이 왔기에 이렇게 조지아를 오게 되었다.

O 형제 부부와 함께. 이서원 제공
O 형제 부부와 함께. 이서원 제공

하루아침에 이산가족 아픔 겪는 사람들
수도 트빌리시에서 약 3시간 이상을 달렸다. 갑자기 내비게이션 통신이 끊겨 길을 잃은 나그네 신세다. 비포장 시골길로 들어서자 천지사방이 우리네 70년대 풍경이다. 가끔 낡은 트럭이 지나가면 뽀얀 먼지가 꼭 눈가루처럼 시야를 막았다. 하는 수 없이 차를 세우고 길에 섰다. 저만치 하얀 수염이 멋진 할아버지가 망아지에 땔감을 가득 싣고 온다.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훅, 40년쯤 거슬러 올라 내가 선 듯하다. 길을 물어도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런데 대화 중에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단어가 쏙 들어온다. 나는 그 말을 낚아채고 거기가 어디냐고 손가락을 가리켰다. 저 미루나무 가로수 끝에서 좌회전해서 조그마한 다리를 건너가라는 뜻이다. 연신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마침내 당도한 가발의 어느 작은 집에서 O형에 부부를 만났다. 어색한 웃음 속에서 서로를 알아본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모두가 이산의 가족들이 서로 이방인으로 있는 여기 사람들은 조지아에서 차별과 무관심, 소외된 아픔과 슬픔을 겪고 있다고 했다. 아름다운 이별이 이 세상에 어디에 존재하랴. 가슴에 품은 아픔을 꾹꾹 누르며 저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에게 내 미약한 도움이 더 미안했다. 

A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한 제기차기 놀이. 이서원 제공
A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한 제기차기 놀이. 이서원 제공

 형제와 함께 꼭 만나야 할 부부가 또 있다. 바로 A 부부다. 이들은 강가 벽돌로 대충 만들어진 오막살이 집에 부엌도 없이 그냥 마당 한쪽에 그릇 몇 개가 엎어져 있는 게 전부였다. 남편은 술주정뱅이로 벌이도 없이 날마다 놀고 있단다. 아이들은 다섯, 이 올망졸망한 앵두같이 어여쁜 아이들은 오리처럼 물에서 종일 놀다 지치면 잠이 드는 최악의 상황에 몰려 있었다. 이들을 어쩌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가족을 품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평화를 주소서! 이 가정에도 화목과 사랑의 온유가 넘치게 하소서! 

 갖고 간 제기를 차며 아이들과 함께 몇 시간을 보냈더니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저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고 매달렸지만 어쩔 수 없다. 기약 없는 이별을 또다시 해야만 하는 마음도 쉽지 않았다.
 

바흐탕고르가살리왕 동상과 메테히 교회. 이서원 제공
바흐탕고르가살리왕 동상과 메테히 교회. 이서원 제공

수도 세우고 정교 수호한 바흐탕고르가살리 왕
돌아와 다음 날 트빌리시 시내를 관통하는 쿠라강변의 낮은 언덕으로 올랐다. 이곳에 서면 웅장한 기마상이 있다. 마치 우리네 김유신 장군 동상과 흡사하다. 주인공은 바로 지금의 트빌리시 수도를 건설한 바흐탕 고르가살리(440~502) 왕이다.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페르시아의 침략을 막으면서 조지아 정교를 지키기 위해 전 일생을 바쳤다. '고르가살리'는 페르시아어로 '늑대 머리'란 뜻이다. 전쟁에서 항상 늑대 머리 투구를 쓰고 싸웠기에 페르시아 병사들이 그렇게 불렀단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며, 당시 강력한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기독교를 지켜내고자 므츠헤타의 스베티츠호밸리 대성당을 재건하고, 지금 이 자리에 메테히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늑대머리 투구 쓰고 페르시아와 싸우며 일생 바쳐
여기 나리칼라성은 거대한 바위산으로 시내를 품어 안고 있는 듯 방어하고 있다. 메테히 광장을 돌아 오르면 바로 교회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 올라와 시내를 조망하고 그저 무덤덤하게 걷다가 내려가 버리지만, 과거를 안다면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 교회는 서른일곱 번이나 무너지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다. 가장 잔인했던 수난은 바로 몽골군의 침략이었다. 종교의 개종을 거부하는 조지아인들 수만 명의 목을 베어 저 쿠라강물에 떠내려 보냈다. 이후, 17~18세기에는 이슬람군 3,000명 이상이 주둔했던 군부대로, 19세기에는 러시아군 감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런 아픈 역사를 가슴에 품은 채 강물은 오늘도 출렁이며 모든 걸 품고 흘러가고 있다. 마치 지금의 평화를 예견한 듯 당당한 저 고르가살리 동상의 위엄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조지아 어머니상. 이서원 제공
조지아 어머니상. 이서원 제공

와인과 검 들고있는 어머니상 지나
메테히 다리를 건너면 높은 언덕 위에 20미터의 거대한 어머니상이 있다. 붉은 벽돌집이 촘촘하게 지어진 좁은 골목길을 오르는 것도 하나의 묘미다. 비록 가난해도 그들의 삶은 평화 위에 세워진 또 다른 자부심일지도 모른다. 작은 난간에는 올망졸망 꽃을 심었다. 할머니 한 분이 물을 준다고 베란다에 서 있다. "감마르죠바" 이제 익숙한 발음에 스스럼없이 인사를 했다. 할머니도 반갑게 손을 흔든다. 저 아름다운 미소, 은발의 머릿결로 흘러내리는 햇살이 마냥 좋다. 

 숨이 차오를 만큼 타박타박 20분쯤 오르면 전통 의복으로 자애의 모성애를 상징하는 듯 하얀 '조지아 어머니상'을 만난다. 이 동상은 왼손에는 와인 잔,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있다. 

 와인과 검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비로 의아해 보이지만, 와인은 찾아오는 이에게는 따뜻한 위로의 잔을, 침략하는 자에게는 칼로 일벌백계하겠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수많은 침략과 약탈의 수난을 겪은 조지아 민족이지만 기독교를 지키려는 몸부림은 지치지 않았다. 차라리 순교는 할지라도 배교는 할 수 없다는 저들의 신앙은 지금의 조지아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자유광장. 이서원 제공
자유광장. 이서원 제공

소비에트·독재정권 저항 비폭력 평화 시위장
한참을 걸어 자유광장으로 갔다. 이곳은 모든 생활권이 집중되어 있다. 환전도, 유심도 이곳에서 교환한다. 여행객은 이곳을 거치지 않고는 갈 수 없으리만치 은행, 문화, 상업의 중심지다. 광장은 로터리 형식으로 가운데는 금빛 동상이 높게 솟아 있다. 바로 '성 조지아상'이다. 악한 용과 싸워 이기는 용감한 사람의 의미가 담겨 있다. 차량은 끝없이 이곳을 돌아 루스타밸리, 살바 디디아니, 코트 아부하지, 푸시킨 거리로 질주해 간다. 이 광장은 우리나라의 명동성당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민주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정권 시절에는 소련 비밀경찰국장 이름을 딴 '베리아 광장', 이후, 레닌 동상을 세워놓고 '레닌 광장'으로 불리다가 마침내 지금의 '자유 광장'으로 명명되었다. 조지아를 사회주의 혁명 국가로 세우려고 적극적인 운동을 펼쳤던 이곳 출신인 스탈린과 그의 동지들은 광장에 있던 은행을 털었다. 지금 한화로 약 4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이 돈으로 그들은 조국을 배신하고 소련에 더욱 충성했으며 마침내 최고 정점에 올라 피도 눈물도 없는 학살로 권좌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금융·문화·상업 중심으로
조지아인들은 1989년 4월 9일 광장에서 소비에트 정권에 저항하는 평화시위를 벌였으며, 소련군대는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또한 2003년에 11월 3일에는 손에 장미를 들고 부정선거로 부패와 독재로 비판받던 대통령 에두아르드 세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의 반정부 평화시위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 혁명은 구소련 국가들에서 민주화의 정치적 개혁을 촉발하는 대표적인 사건이 되었다. '장미'를 손에 든 조지아인들은 비폭력적 혁명을 상징하며 시위대가 무기를 들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마침내 11월 23일 승리의 함성이 울렸다. 뒤이어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혁명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언제든 정의는 승리하고 부정부패는 몰락하는 것이 진리인데도 많은 위정자는 이 자명한 사실을 망각한 채 오로지 권력을 사유화하려고 몰두한다. 이 땅에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던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돌아보아도 민주주의의 깃발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휘날렸던지 의문이 든다. 그저 맹목적인 냄비 건성에 휘둘리며 잠시 잠깐의 흥분된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검증도 안 된 이들을 내세워 지금의 나라가 이렇게 휘청이고 있는 건 아닌지 망연자실 돌아볼 뿐이다. 이서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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