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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고봉의 히말라야를 넘어 봄이 오는 파키스탄. 이서원 제공
거친 고봉의 히말라야를 넘어 봄이 오는 파키스탄. 이서원 제공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한 여행길에 오르다

떠나는 일은 설렘이고 모험이다. 많은 남자는 살면서 아마 히말라야의 산자락을 걷는 꿈을 꿀 것이다. 8,000m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한 산맥을 바라보며, 어느 한적한 시골의 초록 밀밭의 바위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일! 참으로 기막힌 아름다움 아닌가. 일생을 살면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저에게 바라보이는 하늘이 전부인 양 사는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갈 수 없다고 생각하면 포기가 빠르지만, 가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면 그날부터 몸은 이미 반응하기 시작한다. 

 전문 산악인도, 등산도 취미가 아니다. 그런데도 한여름에 눈 쌓인 산을 바라보는 것은 장관인 걸 너무 잘 안다. 낭가파르바트, K2가 있는 파키스탄을 찾아보았다. 그곳은 분쟁의 위험지역으로 긴장되고 기피하는 나라다. '스탄'은 왠지 조금 두렵고 금방이라도 총을 겨누고 쏠 것 같은 긴장감이 가득 찬 이미지가 내게 각인되어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을 국경으로 두고 있으니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이하랴! 이미 내 마음에 품은 저 나라, 파키스탄, 조금은 긴장감을 덜 가지려고 이제 스탄을 빼고 스스로 '파키'라고 부르며 몇 달을 준비했다. 주위의 친구들은 그 위험한 곳에 왜 가느냐고 말렸다. 직장 동료들은 고봉을 올라가려면 고산증이 생기니 그때는 혈액 순환에 좋은 '비아그라'가 꼭 필요하다며 오히려 놀리기도 했다. 

 보통은 그냥 우리 나이쯤 되면 여행사의 패키지를 통해 편안한 휴양지로 가기가 보통이다. 난 그게 싫었다. 거칠고 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달리며 때 묻지 않은 순수의 땅을 밟는 일, 그런 곳이 오히려 더 매력적임을 잘 알기에 돌아서지 않았다. 비행기 예매, 비자도 직접 신청하며 그곳도 사람 사는 나라인데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계속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까지도 인도와 분쟁으로 대립 이어지는 곳

우리가 국가명으로는 잘 알면서도 여행지로는 선호하지 않는 나라가 파키스탄이다. 편견을 깨면 새로운 게 보이는데도 대게의 경우 고정된 관념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나 또한 이슬람 문화가 심하고 하키를 잘한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씩 알아가는 것 또한 여행의 묘미고 매력일 터!

 공식 명칭은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이다. 1906년부터 영국령이었던 인도가 1947년 독립하면서 종교를 근거로 서파키스탄, 동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독립, 분할되었다. 인더스 강변을 따라 국토가 구성되었지만, 카슈미르 지역을 두고 인도와의 분쟁으로 대립 관계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는 왠지 회복되기 어려운 정서처럼 여기서도 인도와는 엄청난 정치적, 군사적, 적대시가 계속되고 있다. 또한 종교의 정체성이 나라의 불안정성으로 이어지다 1971년에는 동파키스탄이 전쟁을 통해 방글라데시로 명명하며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현재의 파키스탄은 예전의 서파키스탄으로 면적이 세계 35위이며, 인구는 2억4,000만명이 넘어 5위다. 

활기 넘치는 노점상들. 이서원 제공
활기 넘치는 노점상들. 이서원 제공

빈라덴 보다 더한 택시기사의 뒤통수

아무에게도 축복받지 못하는 여행,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떠남이지만, 내 배낭의 무게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은 채 하나하나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약 20일간의 대장정으로 4월 26일 인천공항을 이륙, 방콕을 경유해서 밤 10시 반쯤 이슬라마바드 국제 공항에 착륙했다. 탐색도 마치기 전에 링 위에서 훅, 치고 들어오는 복서의 어퍼컷처럼 더운 열기가 호흡을 멈추게 할 만큼 당황스러웠다. 긴장하면 안 돼. 최대한 태연한 척, 여유로운 여행자의 모습이어야 돼. 스스로 다짐하며 무거운 짐을 끌고 공항을 나섰다. 티브이에서나 보았던 하얀 전통 복장에 수염도 덥수룩한 꼭 '오사마 빈라덴'같이 생긴 40대쯤의 남자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난 무조건 "노, 노, 노" 그의 말도 다 듣기 전에 줄행랑을 칠 듯 빨리 걸었지만, 그도 지지 않겠다는 듯 계속 중얼거리며 따라왔다. '이놈 질긴데' 배낭도 무겁고 캐리어도 지친 듯 자꾸 뒤뚱거렸다. 하는 수 없이 돌아보니 그는 자기 택시를 손으로 가리키며 타라고 한다. 시내까지 얼마냐고 하니 7,000루피, 우리 돈 3만5,000원, 그래 이 정도면 괜찮겠지. 깎을 줄도 모르고 그냥 차에 올랐다. 나중 알고 보니 두 배 이상을 받아 간 바가지도 왕 바가지, 총만 안 들었을 뿐이지 빈라덴 보다도 더 무서운 흑기사였다. 

 늦은 밤이지만 릭샤, 삼륜차, 낡은 오토바이 등이 여유롭게 길을 내달리고 있다. 주택가는 가로등도 없고 캄캄했으며 숙소는 골목 안에 있어 조금 무섭고 긴장도 되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직원이 이층에서 내려오며 반갑게 "하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었다. 저택을 숙소로 개조한 듯 깔끔했다. 이미 두어 번의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터라 얼굴은 처음 보아도 왠지 낯설지 않은 이 기분, 첫날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숙소의 아침 풍경. 오른쪽 앞 흰 건물이 모스크다. 이서원 제공
숙소의 아침 풍경. 오른쪽 앞 흰 건물이 이슬람의 예배당인 모스크다. 이서원 제공

이슬람 문화권답게 기도소리로 맞는 첫 아침

새소리가 정겨워 나무 창문을 열었다. 푸른 잎과 능소화 같은 연분홍 꽃이 하늘에서 선녀처럼 내려오듯 사뿐히 창에 기대어 피어있다. 1층으로 내려갔다. 공기는 맑고 청아하다. 의자에 앉았다. 파벽돌로 된 오래된 집이지만 나무와 꽃과 화분이 조화롭게 정원을 가꾸어 놓았다. 등을 깊이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골목 옆에서 확성기로 갑자기 큰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알고 보니 무슬림(Muslim) 종교의 아침 기도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이른 새벽에 이장이 "아! 아! 동민 여러분! 오늘 누구네 집 어르신 환갑잔치가 본가 앞마당에서 있으니 많은 참석 바랍니다"라고 알려주었듯이, 이곳도 시간만 되면 하루 다섯 번씩 이렇게 확성기를 튼다고 했다. 이슬람 문화권에 온 게 분명했다. 처음 맞는 낯선 풍경에 당황했지만 이게 바로 파키스탄이구나 했다. 

 이슬람은 알라를 유일신으로 믿고 무함마드를 신의 사도로 여기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다. 4대 주요 종교(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 중 가장 늦게 등장했지만, 기독교를 추월할 만큼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현재 약 19억명의 무슬림이 존재하며, 이슬람이라는 말은 아랍어로 (신에게의) '복종'이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살람, 샬롬'도 이슬람의 어근에서 왔다. 

 어젯밤 그 직원이 빗자루를 들고 내려와 마당에 떨어진 꽃을 쓴다. 나를 보자 "앗살라무 알라이쿰(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인사를 한다. 나도 그에게 목례를 하며 오기 전에 그토록 외웠던 "앗살라무 알라이쿰"이 입안에서 맴돌며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겨우 어색한 발음으로 "알라이꿍!"으로 답하니 그가 웃으며 탁자 위에 떨어진 꽃 한 송이를 내 손에 올려 주었다.

아침부터 사진을 찍자며 다가온 파키스탄 친구들. 이서원 제공
아침부터 사진을 찍자며 다가온 파키스탄 친구들. 이서원 제공

짜이 한 잔 권하는 사람들 속으로 스며들다

대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아침 산책도 할 겸 분위기를 익히기 위한 첫 내디딤이었다. 큰 도로를 건넜다. 길가에 그대로 누워 자는 사람들, 이른 아침부터 상가 앞 테이블에 앉아 짜이(차)를 마시는 사람들로부터 대여섯 살쯤 되는 어린아이는 자루를 어깨에 걸치고 길에서 빈 병을 줍고 있다. 이방의 생경한 도시 풍경, 우리나라가 백의민족이라고 배웠지만, 여기 남자들도 대부분 전통복인 흰옷을 입고 있다. 바지는 우리나라의 한복 바지보다 좁고, 웃옷은 허벅지까지 내려온다. 하지만, 더운 나라답게 천은 속이 비칠 만큼 얇아서 시원해 보이긴 했다. 

 상가 옆으로 걸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몰려왔다. "니하오, 차이나?" "제페니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어디선 온 거야?' 눈으로 묻고 있었다. 세 번째쯤은 "코리아?"라고 맞추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더 이상 말이 없다. 중국, 일본만이 저들이 아는 나라가 전부였던 것일까. 조금은 아쉬웠지만 "코리아"라고 하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 자기들 자리로 앉으라며 손짓했다. 이들이 한국 사람을 볼 리가 잘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들에게 한국은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어 있을지 그게 더 궁금했다. 

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도로에는 모든 차가 40년은 족히 넘었을 것만 같은 경차 천국이다. 운전석도 우측에 있다. 저 차가 굴러가는 게 더 이상했지만,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는 듯 평화로운 일상의 아침을 호젓하게 즐기고 있었다. 짜디짠 짜이 한 잔을 권하며 나의 손을 잡아 앉히는 인정스러운 사람들 곁으로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이서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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