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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울산에서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쳐 나왔다' 1643년 7월 24일(음력 6월 9일) 울산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한 장면이다. 

 바닷물이 육지를 뒤엎은 쓰나미로 진도 6~7 규모였다. 1643년의 실록에 실린 총 4번이 지진 기사 중 '울산 대지진'은 내용이 상세하다. "이달 9일 신시(15시~17시)와 10일 진시(07시~09시)에 두 차례 지진이 일어나 울산부 동쪽 13리 되는 곳에서 바다 가운데의 큰 파도처럼 물이 격렬하게 솟구쳐서 육지로 1, 2보까지 밀려왔다가 도로 들어갔으며, 마른논 6곳이 갈라져 샘처럼 물이 솟더니 때가 지나자 다시 메워졌는데 물이 솟아난 곳에는 각각 흰 모래 1, 2말이 나와서 쌓여 있었다"라는 보고를 옮겨 놓았다. 

 쓰나미에 모래 화산 폭발과 논밭 유실, 토양 액상화까지 일어났다는 말이다. 서울에서도 진동을 느낄 정도라면 여진이 대단히 강했던 것 같다. 인명 피해도 심각했을 텐데 기록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경상도 울산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인조, 1639년) 등 조선왕조실록에는 무려 1,899건의 지진이 검색된다. 중종 때 464건으로 가장 많았고 명종 343건, 숙종 221건, 세종 141건 등의 순이다. 경상도에서 발생한 지진은 모두 350여 건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100건이 넘는다.

 조선시대 울산의 다른 자연재해도 적지 않게 기록돼 있다. 울산 최초의 대홍수는 조선 태종 때 발생했다. 

 1405년(태종 5) 7월 29일 강풍과 폭우가 발생해 울주 등 여덟 고을에 물이 범람해 작황 손실이 6~70%, 큰 나무가 뽑혔다. 농사를 완전히 망쳐 백성들 삶이 고단해졌다. 1410년 11월 언양 지진과 1427년 9월 15일 언양과 울산 지진, 1428년 5월 울산 태풍 피해, 1430년 4월 중순 울산 지진, 1431년 5월 울산과 기장 지진 등이 실록에 확인된다. 1439년 6월 울산 등지에 짙은 황무(黃霧) 현상에 이어 1641년 10월 22일 '울산에서 일곱 자 크기의 황백색 돌이 해항(海港)의 수심이 반 발(把) 되는 곳에서 육지의 바위 위로 이동하여 놓여 있으니 변이가 심상치 않은 일이다'는 기록과 심각한 가뭄 기록도 보인다. 1442년(세종 24) 6월 울산 등 경상도에 심한 가뭄이 발생해 곳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영농기 수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주민이 벼락 맞아 죽은 일도 있었다. 단종 즉위년인 1452년 6월 울산군 백성이 뇌사(雷死)했다. 벼락을 맞아 죽다니! 괴이한 일을 풀어야 한다며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 1479년(성종 10) 8월 중순 언양 수재로 흙더미에 깔려 죽은 사람이 20여 명, 31가구의 집이 파손됐다. 1512년 4월 울산 지진, 1516년 7월 울산 해일(민가 17채 유실)과 이듬해 여름 언양 수해, 그다음 해 언양 우박피해와 1520년부터 1534년 사이에 우박과 적조, 지진 피해, 벼락 맞은 사망자가 확인되는 등이 실록에는 울산 재해 기사가 많다.

 홍수와 적조 현상, 변고도 여럿 있었다. 1399년 7월 중순 울주 해안에 적조 현상이 크게 번져 수령들이 통도사에 모여 기양제를 지냈다. 바닷물이 붉어서 피와 같았다. 1526년 울산 등 경상도에 전염병이 창궐해 220여 명이 죽었고 확충(蝗蟲 메뚜기 습격)이 발생해 수확할 농작물이 없을 정도로 다 먹어치웠다. 임금의 명으로 범서 입암에서 제를 지냈다. 1647년 4월 5일 (울산에) 대낮에 별이 나타나고 땅에서 우레가 치고 노랑나비의 변괴도 있었다. 1670년 여름 언양 홍수로 수십 명의 사상자에 수백 채의 집이 무너졌고 10명이 숨졌다. 괴질이 일어나 열흘간 34명이 숨졌다. (1677년 2월) 19세기 일성록에는 울산의 홍수피해가 많이 확인된다. 12개 고을에 한 보지락 비가 내렸고 비바람이 불어 울산의 집채가 121호가 무너졌고 익사자가 3명(1830. 8.19)이었다. 이보다 앞선 1826년 8월 26일 민가 212호가 무너졌고, 1831년 7월 17일엔 민가 78호, 1832년 7월 28일 무너진 집채 67호, 1833년 7월 1일 민가 101호가 무너졌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2명, 풍랑으로 실종된 어부가 9명 등이었다.

 조선의 왕은 백성이 재해를 당하면 반찬 수를 간소(減膳)하게 차리고 밥을 물에 말아먹으며(水飯) 술(御?)도 멀리했다. 홍수나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조선의 왕은 적어도 이런 자세와 처신을 하며 애민과 긍휼의 마음을 가졌다. 이것이 조선의 민본정치의 기본이다. 

 지금 우리의 지도층에게 절실한 것도 법보다 철학, 물의 교훈이다.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水則覆舟-물은 배를 띄우지만 잘못하면 배를 뒤집는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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