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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조선 전기, 통신사의 원형이자 전문 외교관으로 한류의 원조라 할 이예(李藝, 1373~1445) 선생. 그는 대일 외교 분야에서 세종이 무한 신뢰를 보낸 주인공이었다. 학성 이씨 시조로 호는 학파, 시호는 충숙공이다.

 선생은 태종과 세종대에 걸쳐 44년 동안 무려 40여 차례 일본과 대마도,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 이키섬(壹岐島) 등을 오가며 외교 사명을 빈틈없이 수행했다. 포로로 끌려간 동포 667명을 찾아 쇄환했다. 일본인의 존경을 받았던 조선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지 5년 후인 1397년, 대마도 왜구 비구로고가 3,000명을 이끌고 울주에 상륙해 난동을 부렸다. 거짓 정보에 놀아난 왜구들이 칼을 휘두르며 행패를 부리고 울주 지주사 이은 등을 납치했다. 이때 관원 대부분은 달아났으나, 스물네 살의 젊은 기관, 이예는 달랐다. 왜선에 몰래 숨어 들어가 바다 한가운데서 신분을 밝히며 "지주사를 모시겠다"고 자청했다. 왜구들은 이예의 충심에 감동하여 이은과 함께 대마도로 데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통신사와 함께 귀환하니 조정은 아전 신분을 면제하고 양반 신분을 주었다.

 이예는 8세 때인 1385년 왜구에게 어머니가 납치당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어머니를 되찾겠다는 결심을 품고 살았다. 왜구의 울주 습격은 그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이후 이예는 본격적으로 일본을 왕래하며 대일 외교 무대에 오른다.

 1401년 이키섬에 파견돼 포로 50명을 데려왔고(학파실기), 1406년엔 남녀 70여 명을 송환했는데 이는 태종실록 기록으로 공식적인 선생의 첫 포로 송환으로 본다. 1416년 1월, 태종이 이예를 콕 집어 "유구국에 가 왜구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노비로 팔려나간 조선 백성이 많으니 송환해 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통신관 이예는 6개월 만인 7월 23일 44명의 포로를 데려왔다. 이 과정에서 호조 판서 황희가 여러 이유로 반대하자 태종은 단호했다. "고향을 그리는 정은 귀천에 차이가 없다. 그대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 그리 잡혀간 자가 있다면 번거롭거나 비용이 든다고 따지겠는가?"

지난해 5월 일본 교토 대한민국 민단 교토부 본부(韓國民團 &nbsp;京都府本部) 건물 앞뜰에 설치된 '통신사 이예' 선생의 동상. 충숙공이예선생기념사업회 제공<br>
지난해 5월 일본 교토 대한민국 민단 교토부 본부(韓國民團  京都府本部) 건물 앞뜰에 설치된 '통신사 이예' 선생의 동상. 충숙공이예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세종은 이예를 더욱 각별히 여겼다. "대마도에 몇 번 다녀왔는가?"라고 묻고, "열여섯 번입니다"라고 하자 갓과 신발을 하사하며 당부하길, "모르는 사람을 보낼 수 없다. 믿을 수 자가 그대뿐이니 귀찮게 여기지 말라"며 미안해했다.

 대신들은 일본 사행을 꺼리고 가급적 발탁되지 않으려 몸을 빼는데 이예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험하고 위험한 길을 마다치 않고 자청하니 얼마나 고마웠겠는가. 세종은 종종 특별 선물을 내리고 무한신뢰를 보낸다. 몇 번 탄핵이 들어올 때 직접 변호하기도 했다. 상사나 부하의 잘못으로 세 차례 탄핵당할 때마다 세종은 "이예는 죄가 없다"라며 매번 불문에 부쳤다. 어떤 경우엔 이예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이미 끝난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고 향후 대책이나 논의하라"고 옹호했다.

 이예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었다. 그는 대마도와 일본 열도의 정치 구도, 지역간 권력 관계, 왜구의 동향까지 꿰뚫었다. 뿐만아니라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조선에 자전 물레방아를 도입했고 일본식 상가 제도의 시행을 건의하는 등 양국의 문화·경제 교류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또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 민간에 의한 광물 채취 자유화와 이에 대한 과세,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 외국 조선 기술의 도입 등을 건의해 첨단 무기 제조에 공헌했고 현대의 구축함이나 쾌속정 같은 기동성 있는 전투함을 도입해 국방력 증강에도 이바지했다.

 1443년, 선생은 마지막으로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맺었다. 이 조약 후 중종 때까지 100여 년간 조선은 한 번도 왜구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이 제2, 제3의 이 예를 키웠다면 임진왜란이라는 재앙도 없었을 것이란 전문가 의견이 있다. 새 대통령의 말처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그것이 외교의 정수요 그 정수를 평생 실천한 인물이 이예였다.

 울산이 낳은 우리나라 최고의 외교관, 그리고 조선이 끝내 다시 갖지 못한 외교의 거목. 그의 동상은 오늘도 울산 남구문화원 뒤 공원과 국립외교원에서 조용히 지나온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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