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하리'였다. 감시병, 망보기라는 일본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유달리 눈이 밝았다. 별빛만 있으면 밤길에서도 엽전을 골라냈고, 가을 들판에서 메뚜기가 툭 튀기만 해도 그 궤적을 따라 손으로 잡아챘을 정도였다. 모두가 신기해했고, 밝은 눈이 내 평생의 복이 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 눈은 결국 나를 바다로 내몰았다. 고래를 쫓는 자리, 일본 포경선 망루 위였다. 당시 조선인 미하리는 극심한 차별 속에 왕복 항해에 두달이나 걸리는 남빙양 포경에 나섰다기 1∼2개월 휴가를 받아 집에 와서 신나게 놀았다. 주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영웅대접을 받았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같은 기간의 휴가를 받아 머물다 가고나면 다음 해엔 며칠 간격으로 동네 여기저기서 아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처음엔 동네 김씨가 남빙양에서 개선장군처럼 돌아와 많은 월급과 활약상을 자랑하면서 눈밝고 힘센 장생포 사람들이 1937년부터 앞다퉈 포경선단을 탔다. 선원들은 35원 하던 군수 월급 두 배인 85원을 받았다. 쌀 1가마 5원하던 때였다. 장생포 청년 미하리 스무 명은 일본 해군에도 징용당했다. 이유는 단 하나, 눈 밝고 힘이 세다는 것. 3개월간의 교육을 받곤 주로 수송선에 배치됐다. 마스트 꼭대기의 둥지 같은 관측대에서 적함이나 잠수함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쌍안경은 시야가 좁다며 버리고 오직 눈으로만 관측하던 조선 청년 4명이 수송선 격침으로 수중고혼이 됐다.
나는 운좋게 살아 돌아왔다. 장생포 바닷바람 속에는 내 청춘이 머물러 있다. 포경선 망루 끝에서 나는 매일 수평선을 훑었다. 바다 위 어딘가 솟아오르는 물기둥, 고래의 숨결을 기다리는 것이 내 일이었다. "있다!" 소리치는 즉시 고래는 작살에 꿰였고, 바다는 붉게 물들었다. 선장은 내 등을 치며 웃었고, 피비린내에 진저리를 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밤 꿈에 고래가 내 눈을 향해 울부짖었다.
미하리는 시급이 높았다. 대신 위험했다. 고래를 놓치면 배 전체가 허탕을 치기에 내 눈은 의심받았고, 일본인 선원은 나를 몰래 밀기도 했다. 바다에 빠진 조선인 미하리가 돌아온 경우는 드물었다. 바다에 빠진 나를 건지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내 눈이 밝다는 사실이, 오히려 삶의 방향을 잃게 만들었던 것인가 싶어 슬펐다.
그 시절 남빙양포경은 세계 포경사의 절정이었다. 1938년 6개국 41개 선단 2백56척이 출어, 1만4,900마리의 대왕고래를 포함해 4만6천39마리의 고래를 살육했다. 55만6,721t의 기름을 빼냈다. 포획두수에서 남빙양은 세계의 84%, 산유량의 91%를 차지했다. 일본은 1940∼41년 사이 9,948마리를 잡아 최고 신기록을 남겼다. 1941년 12월8일의 진주만공격은 수난의 고래들에게 숨돌릴 수 있는 잠시의 시간을 제공했다. 남빙양의 번성과 동시에 장생포는 붐볐다. 고래를 해체하는 인부만 수백 명이었고, 구경꾼도 인산인해였다. 장생포는 동해안 최고의 항구로 번성했고, 포경선에서 돌아온 청년들은 영웅이었다. 그중에는 일본 포경선단에 자원해 남빙양까지 나갔다 살아온 사람이 최고였다.
광복 후 집에 왔을 때, 내 눈은 희미해져 있었다. 먼 수평선만 바라보던 눈은 육지의 초점에 맞지 않았고, 작은 글씨도 읽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내 청춘은 고래와 함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나는 다시는 바다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항구에 정박한 낡은 배를 보면, 그 망루 끝에서 허공을 응시하던 내 청춘이 떠오른다. 태양을 등지고, 매일 고래를 울리고, 매일 울던 나의 스무 살. 장생포의 청년들과 나의 눈은 결국 밝아서 불행했다. 인생의 아이러니였다. 고래를 찾아 헤맸고 빙산을 보았고, 물기둥을 보았고, 잠수함도 보았지만, 나의 삶은 보이지 않았다. 정작 자신과 가족의 삶을 위한 길은 볼 수 없었다.
해방 후 장생포의 포경은 활황이었고 고래고기는 수출 효자 품목이었다. 남획으로 결국 고래는 줄었고, 고래와 함께 웃던 청춘들도 사라졌다. 장생포의 바람은 여전히 바다 냄새를 품고 있지만, 망루 위에서 울던 청년은 이제 이 땅 어디에도 없다. 단지 오래전 눈 밝은 죄로 바다에 강제 징발된 미하리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 있을 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조선인 미하리! 또다른 징용의 피해자들이다. (덧:해방 후 일본에서 귀국한 우리나라 포경 기술자는 한국포경업 선구자 김옥창 등 300여명이었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