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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울산이 낳은 두 사내가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로 남은 이들이다. 한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갖은 핍박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 끝내 희생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평생 어둠과 악의 편에서 조국을 배신하고 짓밟았다. 유방백세와 유취만년의 대명사인 두 사람은 이관술과 노덕술이다. 울산에서 고향인 두 사람은 한 시대를 정면으로 가로질렀다. 그들의 발자취는 극과 극으로 갈라져, 결국 서로의 운명을 뒤틀었다.

 학암 이관술, 1902년 울산 범서 입암리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마치고 동덕여고보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조용한 교사로만 있지 않았다.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던 그는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재유와 함께 '경성콤그룹'을 이끌며 일제의 심장을 향해 저항의 불꽃을 지폈다. 이관술은 15년 넘게 이름을 감춘 채 농부나 엿장수로 변장해 지하조직 활동을 이어가다 1941년, 끝내 체포됐다. 그를 심문한 이는, 고향 울산 장생포 출신의 노덕술이었다. 노덕술의 고문은 악명 높았다. 하지만 이관술은 굴복하지 않았다. 단식으로 버티고, 조직을 지켜냈고, 동지들은 살았다. 그는 끝까지 '말하지 않은 자'로 남았다. 해방이 찾아온 후에도 그는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남북이 갈라지는 비극 앞에서 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외쳤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학암 이관술(도쿄고등사범대학졸업앨범)<br>
학암 이관술(도쿄고등사범대학졸업앨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과 선전부장, 민주주의 민족전선 중앙위원 등을 지내다 가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투옥, 1950년 총살당했다. 이관술은 월북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죽었다. 북한 정권 수립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어긴 사실도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광복 후 정치인으로 활동한 기간은 8개월에 불과하다. 언양 반곡초등학교를 지을 때 포양 권 선생과 함께 많은 땅을 기부했다. 이관술이 남긴 것은 권력도, 재산도 아닌 신념과 침묵, 그리고 부서지지 않은 의지였다.

 천하의 악질 순사 노덕술은 1899년 장생포 생이다. 소년 시절부터 일경 밑에서 견습 경찰로 일했고, 일제 강점기 내내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쳤다. 그의 손에 죽고 다친 독립운동가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가 체포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해산하고 그를 석방했기 때문이다. 육군 헌병대장으로 복귀, 약산 김원봉을 폭행하고 좌익 혐의자들 색출과 고문에 앞장섰다. 그는 해방 후에도 여전히 과거의 악행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오래 웃지 않았다. 4·19 혁명 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울산시민들의 분노에 밀려 낙선했다. 말년엔 철저히 고립되었고, 1968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죽은 뒤에도 그의 이름은 악행의 대명사로 남았다.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 재판정의 노덕술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 재판정의 노덕술

 

그는 마쓰우라 히로(松浦 鴻)로 창씨개명했다. '고문귀' 하판락, '고문왕' 김태석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잔인하게 고문한 친일 경찰의 대표 3인방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반민족행위자로 수록되었다. 수많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중에서 이완용, 송병준과 함께 가장 인지도가 높고, 매국노가 아닌 친일반민족행위자 중에서도 단연 최악으로 첫손에 꼽히는 인간말종이란 악평이 아직도 이름 뒤에 따라다닌다.

 울산의 아들 이관술과 노덕술. 서로를 알아보았을까. 지하실 고문실에서, 피와 침묵이 교차한 그 날. 노덕술은 채찍을 들었고, 이관술은 이를 악물고 견디어야만 했을 터. 한 사람은 고문 기술자였고 다른 이는 독립운동가였다.

노덕술의 체포 경위를 보도한 당시 신문. 김잠출 제공<br>
노덕술의 체포 경위를 보도한 당시 신문. 김잠출 제공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까. 누구의 생애에 경의를 표해야 할까. 이관술은 한때 지워졌던 이름이었다가 이제 빛으로 돌아오고 있다. 국가는 그가 부당하게 처형당했음을 인정했고, 시민사회는 그를 추모하기 시작했다.

 노덕술도 결코 잊히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다만 교훈으로, 반면교사로 남을 것이다. 일제와 부당한 권력에 복무한 자의 말로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정의가 패배했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상 형성에 역사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역사의 교훈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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