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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1945년 8월 16일, 울산 읍민들이 북정동 언덕에 모여들었다. 동헌 뒤편, 지금의 울산시립미술관과 울산초등학교 터가 있는 북쪽 언덕배기였다. 시가지 전체를 내려다보는 높은 자리, 한때 울산의 랜드마크처럼 우뚝하던 일제의 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주민들은 곡괭이와 망치를 들고 제단을 허물었다. 도리이(鳥居)는 힘겹게 뽑혀 쓰러졌고, 그 잔해는 땅속에 묻혔다. 침묵 속에 오래 참아왔던 조선의 분노와 수치심이 그날 처음으로 흙바닥 위에서 숨을 쉬었다.

 울산에도 신사가 있었다. 한곳도 아니고, 세 곳 이상이었다. 울산 신사와 방어진 신사, 그리고 장생포 신사가 알려져 잇지만 1911년 9월에 방어진 남단에 세웠던 작은 사당도 신사 구실을 했다. 또 당시 울주지역에도 건립이 착수된 흔적이 있다. 모두 일제가 강제한 '황민화 정책'의 상징이자 군국주의의 학습장이었다. 참배는 신앙이 아닌 강요된 복종이었고, 신사는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닌 정신적 병영이었다.

 울산 신사(중구 기상대길 4-1)는 1923년 12월 20일 북정동 언덕에 세웠다. 천장절이나 승전기념일에 참배식을 열고, 학생과 주민이 고개 숙이고 허리 굽히며,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신 앞에 예를 갖췄다. 봄가을 마쓰리에 강제 동원되고 매년 9월 1일 '애국일'에 새벽 5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신사 참배와 묵념을 했다. 거절은 불가능했다. 방어진 신사(동구 방어동 204-14번지)는 1927년 6월 30일, 지금의 용왕사 자리에 세워졌다. 1938년 주민 3천여 명의 주민을 모아 지원병 가는 청년을 전송하는 의식을 열었다. 장생포 신사(남구 장생포동 212-2)는 1927년 7월 24일, 장생포 천지만디에 세워져 1937년에 울산군 대현면 주최 무운장구 기원제를 거행했다. 아직도 신사의 기단 일부가 남아 있어 건립연대와 목적을 읽을 수 있다.

장생포의 일제 신명신사(神明神祠) 터<br>
장생포의 일제 신명신사(神明神祠) 터(자료 사진). ⓒ울산신문

 

"아이치현 사람 마루야마 노스케(丸山利之助)가 1910년 집을 짓고 살다가 1927년 신사 부지 222평을 기증한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며 씨족 신의 후손 일동이 비를 건립해 영구히 전한다"는 내용이다. 1932년 4월 '신명신사 숭경자 일동'이 세운 공덕비다.

 울산의 신사는 모두 '신명신사'였다. 조선총독부가 정식 허가한 1등급 신사(神社)가 아닌, 격이 낮은 2등급 신사(神祠)였다. 하지만 참배의 강제성과 정신적 억압은 다르지 않았다. 일본인이 밀집하거나 시가지 조망이 가능한 높은 구릉지에 신사를 세워, 그들은 내려다보고 조선인들은 늘 올려다보게 했다. 물리적 위계는 곧 정신적 강제였다.

 1936년부터 '1면 1신 사주의' 정책에 따라 면 단위까지 신사 건립을 독려했다. 1940년 3월 6일 『부산일보』는 '황기 2600년 봉축 기념사업:강동면민의 열의로 신명신사를 건립하다'라는 기사에서, "면장과 학교장 등이 침식을 잊고 희생적 열의로 지난 3일 오전 11시 강동면에서 공직자들 학생 유지 경방단 국방부인회 등 300여 명이 모여 굴미군수 경찰서장 등이 지진제(地鎭祭)등 신명신사 건립 제의를 성대히 치렀다"고 전한다.

삼남신사 건립 관련 기사(1940.3.30). 김잠출 제공<br>
삼남신사 건립 관련 기사(1940.3.30). 김잠출 제공

 

이보다 앞선 3일 자에 '三南신사 건립에 봉사단 활동하다;올가을 대제까지 조영 완성(울산)'이란 제목으로 "삼남면 牛來千里씨가 1938년 10월 건립을 목표로 삼남신사봉제기성회를 조직해 일본인 등 1,600여 명 회원 모집하고 3천수백 원의 기부금을 모금해 삼남 가천리 신사 부지 매입과 작년부터 평탄 작업을 진행했다. 47개 부락 진흥회 봉사작업 1,500여 명이 신사 건립 공사작업에 참여. 작년 12월 말 신사 부지 공사 완성하고 오는 11월 3일 대제일에 신전과 도리이, 국기 게양대, 동방요배장을 완성 목표로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보도했다.

 신사 터와 유구는 치욕스러운 역사의 흔적이자 증거이다.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울산 근현대사 현장이다. 울산 어느 곳에 신사가 또 있었는지 확인하면 울산 지역사의 한 귀퉁이가 메워지면서 폭이 더 넓어질 것이다. 역사는 기록되고 기억할 때 비로소 교훈이 된다. 내선일체와 일본혼(大和魂) 고양을 위해 전국에 신사를 세우고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했던 일제는 전국에 총 81개의 공식 신사(神社)와 865개의 신명신사(神明神祠)를 세웠다. 『조선총독부 관보』(1915~1945)에 따른 것이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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