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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판더밸리마을 전경.&nbsp;이서원 제공<br>
 판더밸리마을 전경. 이서원 제공

무하마드 동네에 있는 숙소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여느 마을과 다름없는 언덕을 돌아서는데, 공터에는 보라색 들꽃이 장관을 이루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라색 꽃향기는 붉은 노을에 대비되며 한껏 멋을 더해 내게로 다가왔다. 

 우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농로를 따라 흙담 길을 꺾었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 저 산비탈을 비켜 작은 도랑을 타고 돌돌돌 노래를 부르며 앞의 집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집이 오늘 밤 나의 숙소였다. 집을 들어서는데 우리네 어느 대감마님이 살았던 오래된 전통 가옥 같았다. 아마도 옛날 이 동네의 족장쯤 되는 분이 살았던 집인 듯 크기는 어마어마했고 마당은 새롭게 공사를 하느라 분주했다. 

아흔아홉칸 부럽지 않은 대저택서 하룻밤 호사

갑자기 예약도 하지 않고 들어선 나를 주인은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맞아 주었다. 무하마드가 가끔 손님을 이 집으로 안내하는 듯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주인은 미남형으로 아주 멋있고 훤칠한 서구형 인물로 친절하고 자상했다. 이제 새롭게 공사를 해서 호텔로 사용할 거라며 공사로 마당이 지저분하다며 미안한 듯 정원 뒤의 방으로 안내했다. 

 이건 한 칸 방이 아니다. 우리나라 민속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아흔아홉 칸의 대저택과도 같다. 100평 훨씬 넘어 보이는 독채였는데 여기서 묵으란다.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자 주인은 아주 흡족한 듯 괜찮다며 오히려 더 미안해했다. 거실에는 전통 활과 칼이 벽에 장식되어 있었으며, 섬세한 주인의 안목을 더해 일류 호텔과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오래된 목창(木窓)을 열자 오밀조밀한 마을과 설산, 키 큰 미루나무가 이제 막 연초록으로 잎을 틔우고 있었다. 이런 집은 태어나 처음이다. 호사스러운 방을 홀로 뒹굴자니 이 밤의 시간이 너무 아깝고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자, 주인은 나를 불렀다. 멀리서 온 나를 위해 저녁을 준비하겠단다. 흔쾌히 무하마드와 셋이 주방 겸 거실인 방으로 들어갔다. 두 여인이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어 시간 이상 음식을 만드느라 주방장은 분주히 움직였다. 밖에서 닭을 꼬치에 꿰어 숯불에 구워준단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부채질로 불을 은은하게 지피고 있었다. 그건 내가 하겠다면 부채를 받아 쥐었다. 화로에 숯은 이글거리고 그 위에 닭고기가 맛있게 구워지고 있는 밤, 이 호사스러운 저녁을 또 어떻게 보내랴. 

 다 구운 닭을 담아 내자 이번에 또 마지막으로 난을 굽는다. 우리 어머니가 밀가루 반죽으로 칼국수를 밀 듯이 여기도 흡사하게 반죽을 밀었다. 이번엔 키가 작은 보조 주방장이 이걸 해보겠냐는 눈짓이었다. 이쯤이야 나도 할 수 있다 싶어 흔쾌히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아뿔싸! 작은 홍두깨로 반죽을 밀었지만, 찰진 농도가 우리 밀가루와 다른지 쉽게 되지 않았다. 다시 손에 힘을 주어 밀자, 이번엔 난이 휙~ 방 저쪽 끝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주인, 무하마드, 두 여인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방 천장이 날아갈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난과 빵과 닭꼬치 구이는 정말 최고의 만찬이었다. 조금 지나 그의 아내도 돌아왔다. 모두 둘러앉았다. 두 부부는 미국 유학파로 아주 멋진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나이를 물으니 맞추어 보란다. 그래도 너무 많이 보면 안 되니 약간 적게 "38?" 그는 갑자기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알고 보니 마흔여덟이란다. 뒤질세라 내 나이는 어떻게 보이느냐고 물으니, 그가 더 크게 웃었다. 정확하게 맞추었다. 이런 낭패!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아느냐고 물으니 내 얼굴을 보면 안다고 했다. 하하 알고 보니 나의 여권을 이미 보았다며 이실직고했다. 그렇게 늦게까지 함께 정말 멋진 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두 주방 여인은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전통 복장으로 풀 메이컵을 하고 아침상을 차려내 왔다. 정원엔 체리꽃이 피어있고 불어오는 설산의 아침 바람은 너무나 상쾌했다. 마당의 작은 탁자에 앉아 허브차에 달걀을 넣은 빵으로 내 인생 최고의 멋진 아침을 먹으며 우린 다시 못 만날 이별을 나누었다. 언덕을 내려오다가 돌아보니 이직도 두 부부는 마당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험한 비포장길 넘어 드디어 도착

다시 무하마드와 함께 목적지인 판더밸리(Phander Valley)로 달였다. 이곳은 길기트에서 하루에 오기는 너무 먼 거리로 대개의 경우 중간에 나처럼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도착한다. 길이 워낙 험하고 비포장길이라 쉽게 올 수 없는 마을이었지만, 나는 꼭 이곳에 들러보고 싶었다. 오는 동안 길이 공사로 몇 시간씩 지체되어 저녁에서야 겨우 도착했다. 무하마드는 여행 가이드로 이미 익힌 동네 사람들인 듯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숙소로 갔다. 그냥 자기네들이 평소에 쓰는 방을 내주는 듯 일반 가정집이었다. 온수도 안 나오고 전기도 부족했지만, 이 깊은 산골에 이것도 호강이라 여겼다. 

새벽녘 펼쳐지는 보석 같은 풍경에 콧노래가 절로

어떻게 잠을 잤을까. 새벽에 눈이 떠졌다. 마당에 섰다. 아직 봄은 저 설산을 넘기에는 버거운지 찬 바람이 휘이익 불어왔다. 별이 쏟아지는 동네, 내가 어디서 와서 지금 이 땅, 이 마을, 이 집에 서 있는 걸까. 하루라도 전화하지 않으면 고향의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이라 바로 내게 전화를 하는 분인데, 일주일째 전화가 없는 아들을 얼마나 걱정하실까. 일부러 이곳으로 여행을 간다고 말씀을 안 드렸으니 지금쯤 안달이 났을 것은 분명하다. 대게 이 나라는 한국에서는 여행 기피국으로 알고 있다. 막상 와 보면 이곳도 사람 사는 곳, 모두가 친절하고 환대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린 지레 겁을 먹고 선입견으로 이들을 대하는 모순에 젖어있음이 안타깝다.

숙소에서 바라본 미루나무가 우거진 마을 전경.&nbsp;이서원 제공<br>
숙소에서 바라본 미루나무가 우거진 마을 전경. 이서원 제공

 새벽잠을 설치고 일찍 일어났다. 꼬불꼬불한 밭둑길을 따라 강가로 나섰다. 이제 막 돋은 풀들에 앉은 이슬이 보석처럼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한참을 걸어 강가에 닿았다. 물길이 출렁이며 흘러가고 강 가로 끝없이 줄지어 선 미루나무가 정말이지 내 인생 최고의 한 장면을 연출해 주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키 큰 미루나에 앉은 작은 새 같은 나, 잔잔한 수면으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 모든 조화가 어느 손길이 있어 이토록 경이롭게 빚었을까. 

 "포플러 이파리는 작은 손바닥(손바닥) 잘랑잘랑 소리난다 나뭇가지에(가지에)" 물론 다른 나무지만 이 강가를 걸으며 왜 이 동요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혼자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간 건너로 목교를 건넜다. 어린 남자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내 앞을 왔다 갔다 낯선 내가 신기했던지 계속 따라왔다.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부끄러웠을까, 골목을 돌아 사라져 버렸다. 

 살구꽃이 핀 언덕의 마을은 그림보다 더 아름다웠고, 미루나무가 배경으로 흐르는 강의 유속은 내 삶의 깊은 심장으로 조용히 흘러 들어왔다. 

이방인을 초대하고 전통악기를 연주해주는 사람들. 이서원 제공<br>
이방인을 초대하고 전통악기를 연주해주는 사람들. 이서원 제공

이방인 초대하고 전통악기 연주해 주는 사람들

담이 나지막한 집을 돌아 내려오는데 할아버지가 무어라 한다. 돌아보니 다시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이른 아침인데 할아버지는 자기 집으로 나를 초대하고 싶단다. 집으로 들어서니 아까 그 꼬맹이가 이 집 손자였다. 할아버지 부부와, 두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들까지 열 명은 족히 넘는 대가족이 사는 아주 다복한 가정 같았다. 할아버지는 아주 호탕하고 흥이 많아 보였으며, 큰아들도 아주 훤칠하고 멋있었으며 나를 환대해 주었다. 부전자전일까? 다 같이 둘러앉자, 두 며느리는 바로 짜이와 난을 구워 내왔다. 어디서 왔느냐? 어떻게 이곳까지 왔느냐? 나는 뭐 하는 사람이냐? 등등 질문이 쏟아졌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며 더 친근하게 웃었다. 그때 할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전통 악기를 연주해 주시겠다며 즉석에서 연주했다. 그러자 두 아들도 다른 악기를 들고 합주에 합류했다.  아침부터 갑작스럽게 들어온 나를 위한 하모니는 무슨 조화란 말인가. 천상의 음률이 이 집 마당의 살구꽃을 더 활짝 피우게 했다. 연주가 끝나고 할아버지는 내게 코드 잡는 법을 가르쳐 주시겠단다. 기타와 비슷했지만 쉽지 않고 음이 튕겨 제대로 나오지 않자 답답하다는 듯 그게 아니라며 다시 본인이 연주를 신나게 해 주었다. 

난 만들기 배우는 필자.&nbsp;이서원 제공<br>
난 만들기 배우는 필자. 이서원 제공

 참으로 다정다감한 사람들, 대가족이 함께 사는 며느리, 손주들의 재롱으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게 이 땅의 문화일까? 아직도 이런 문화가 살아있음이 반갑고 정겹다. 우리 어릴 적에도 할아버지, 부모님, 삼촌, 우리 삼형제 도란도란 즐거웠던 추억이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봄이 오면 집 뒷마당에 있던 물이 오른 미루나무 작은 가지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불며 학교로 갔던 추억이 생각났다. 불현듯 저 가지 하나를 잘라 이 아이들에게 피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너무 짧았다, 무하마드가 저 강 건너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을 열심히 하고 있었기에. 이서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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