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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삼 시인·초록별지구수비대원
김윤삼 시인·초록별지구수비대원

 

하루가 시작될 때마다 나는 작은 컵 하나를 떠올린다. 안에는 나의 마음이 담겨 있다. 어떤 날은 물이 반쯤 비어 있고, 어떤 날은 표면이 잔잔하다. 때로는 금이 가 있고, 때로는 넘칠 듯 흔들린다. 나는 그 컵의 주인이다. 누가 대신 채워주지 않는다. 내가 내 손으로 물을 따라야 한다.

 지난 시절 나는 비우는 것이 미덕이라 믿었다. 비우면 가벼워지고, 비우면 맑아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비우면 텅 빈 그릇이 된다. 공허는 맑음이 아니라, 자신을 잃은 상태였다. 나를 돌보지 않은 채 타인을 챙기는 일은 마른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길어 올려도, 바가지는 끝내 모래만 담았다.

 어느 날 거울 앞에 멈춰 섰다. 얼굴에 생기가 사라졌다. 눈빛은 흐릿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그때 알았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사랑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남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스스로 소모하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부정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물을 따르는 연습을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나에게 다정한 말을 건넨다. '괜찮다' '오늘은 충분히 애썼다' '조금 쉬어도 좋다'

 짧은 문장들이 마음의 가장 낮은 곳을 적신다. 말은 물이 되어 천천히 스며들고, 말의 물결은 내 안의 주름을 펴 준다. 나는 매일 내 안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나를 조금씩 채운다. 사람들은 나눔이 사랑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흘러넘침이다. 채워지지 않은 컵은 나눌 게 없다. 넘치는 순간 물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그것은 의무가 아니라 삶의 리듬이다. 내가 나를 따뜻하게 품을 때, 화사한 온기가 나도 모르게 밖으로 번진다.

 나는 이제 나를 닦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하루의 먼지를 털고, 마음의 잔금을 닦는다. 조용히 차를 우려 마시며, 내 안에 고인 생각을 바라본다. 잔잔함 속에서 작은 빛이 움직인다. 내 마음의 온도다. 나는 따뜻한 온도를 잃지 않으려 한다.

 어떤 날은 마음이 금이 간 컵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밑으로 새는 날이 있다. 그럴 땐 애써 채우지 않는다. 조용히 들여다본다. 금이 간 자리에도 햇빛이 스민다. 깨진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더 아름답다는 걸, 이제 안다.

 나는 예전보다 느리게 걷는다. 길가의 풀잎 하나에도 물기가 비친다. 작은 반짝임이 내 안의 물결과 닮았다. 나는 여린 물을 조금 덜어 타인에게 건넨다. 억지로 흘려보내지 않는다. 흘러나온 만큼만 나눈다. 베풂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의 모양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너무 자기 자신만 챙기는 건 이기적이다"

 그러나 내 몸이 먼저 알고 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타인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슬픔을 오래 안아주지 못한다는 걸. 세상은 여전히 거칠고, 삶은 자주 우리를 덮친다. 그럴수록 나는 내 안의 물을 지킨다.

 비가 오면 우산을 접고 잠시 서 있다. 빗방울이 내 마음 안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소리가 내 안에서 오래 울린다. 가끔은 물이 향기를 띤다. 오래된 책장 속 문장처럼, 기억 속 한 구절이 내 고요를 흔든다. 나는 살아난 문장을 품고 하루를 산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 오래전 들었던 음악, 창문을 스치는 바람 하나가 물결처럼 번진다. 그렇게 다시 채워진다.

 내 안의 문이 조용히 열린다. 나를 사랑한다는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잘 자는 일, 따뜻하게 먹는 일,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모든 단순한 행위가 내 마음의 물을 채운다. 그리고 물이 넘칠 때, 나는 비로소 베푼다. 그 베풂은 선행이 아니라 순환이다. 내 안의 따뜻함이 타인에게 닿고, 그의 미소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순간, 우리는 같은 강물 위를 흐른다.

 가득 찬 마음은 흘러넘치지 않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나올 뿐이다. 물은 나의 온기이자 존재다. 흐름이 멈추면 나는 나를 잃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를 채운다. 좋은 말, 좋은 숨, 좋은 눈길로. 내 안의 물이 고요히 차오를 때, 세상은 조금 덜 어둡다. 사랑이란 결국, 내 안의 컵을 가득 채워 넘치게 하는 일이다. 따뜻한 넘침이 세상을 적신다. 내가 나를 사랑할수록, 나는 더 깊이, 더 부드럽게 세상을 사랑한다. 가득 찬 컵에서 흘러나온 물로,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을 적신다.   김윤삼 시인·초록별지구수비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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