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이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는 건 자주 듣는 얘기다. 이 얘기에 발맞춘 책도 많다. 읽어보면 서평일 수밖에 없지만 저자에 따라 책을 논하는 방향은 각자 조금씩 다르다. 방향이 어떻든 누군가의 생각을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소설이나 시, 수필 등의 문학 작품도 좋지만 서평집도 마찬가지다. 독서와 관련된 많은 책이 저자가 읽은 책을 독자에게 은근히 읽기를 권한다. 자신이 읽은 책이 삶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주었는지, 스스로를 어떻게 성장시켰는지를 저자의 삶과 함께 버무린 내용의 책들이다.
저자의 대부분은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 만한 유명인이거나, 한 분야에서 자신의 위치를 굳건하게 세운 사람들이다.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새로운 독자들을 만들어내는 책들이 많아진 건 바람직한 현상이다. 읽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점에 신선함을 느껴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치기도 하고, 읽지 않았던 책은 구해서 읽게 되기도 한다. 어쩌다 보니 나도 이런 책을 종종 읽는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어서일까. 내가 이런 종류의 책들을 읽는 방향은 좀 다른 것 같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종종 내 안의 숨겨진 문장이 깨어나는 순간을 느낄 때가 많다. 문장은 언제나 먼저 누군가의 마음에서 태어나고, 독자는 그것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 그럴 때다.
그런데 '독서로 쓰다'(장하영/더로드)는 좀 다르다. 저자를 익히 알고 있어서인지 우선 반가웠다. 저자의 당당하고 밝은 에너지가 독서에서 생겨난 것이란 걸 알고는 미더웠다. 이 책은 저자가 어렵고 힘든 시기를 독서롤 통해서 극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틈새 독서에 탐닉한다는 저자의 독서습관과 짤막한 독서감상과 책에 대한 생각을 적은 책이다. 읽으면 누구나 쉽게 행할 수 있을 것처럼 편하게 읽힌다. 하지만 부끄러웠다. 작가라는 내 이름이 민망할 질문을 스르로에게 하면서. 나는 그만큼 치열한 독서를 한 기억이 없고, 지금도 저자처럼 많은 책을 그렇듯 틈틈이 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감각은 내면의 잠복기였다. 읽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음이다. 문학적 문장은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독자가 자기 내면의 어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저자는 그런 문장이 빛나는 이유를 아주 담담하게 알려준다. 좋은 문장을 만났을 때의 찌릿한 전율, 설명할 수 없는 울림, 예기치 못한 사유의 문이 열리는 순간들. 그 모든 감각이 결국에는 쓰는 행위로 이어진다는 데 저절로 공감도 한다. 읽으면서 뭔가를 써야 할 것 같아 손끝이 간질거렸고, 마음속에서는 오래전 잊고 있던 말들이 반짝이며 떠올랐다.
독서는 곧 나를 읽는 일이다. 책이라는 타인의 거울을 통해 마음의 매무새를 고친다. 어떤 문장에서는 잊었던 자신이 나타나고, 애써 외면해온 자신의 한 시절을 만나기도 한다. 무심코 접한 한 문장이 좌우명이 되는가 하면 이해되지 않아 마음을 앓던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우치는 단락도 만난다. 같은 아픔을 겪은 이의 문장을 만나면 다독여주기도 한다. 저자 역시 독서를 통해서 비슷한 경험을 했고, 어떤 경우든 긍정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음을 알았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 전에 읽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더 많이 읽어야 좋은 생각이 생기고, 독자가 편하게 읽을 글을 쓴다. 읽는다는 것은 결국 세계와의 거리를 조금 더 정확히 재는 일이며, 나와 나 사이의 틈을 부드럽게 메우는 일이다. 독서는 쓰기의 그림자이며, 쓰기는 독서의 증언이다. 이 책이 알려준 것이다. 읽는다는 행위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읽는 동안 독자는 끊임없이 선택하고, 비교하고, 느끼고,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한 문장을 깊이 읽는다는 것은 그 문장을 빌려 잠시 나를 살아보는 일이다. 그렇게 살아낸 감정과 생각이 쌓여, 마침내 나만의 문장이 태어난다. 독서는 나에게 말을 건네고, 나는 그 말의 잔향을 글로 남긴다. 책의 문장들이 내 마음의 결을 닦아준다면, 쓰기는 그 결을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 같은 것이다. 고요하지만 분명한 방향을 가진, 나만의 강물. 나이를 먹더라도 맑게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는다.
'노년의 독서는 살아 있는 감정을 유지하는 마지막 예의다' 장세련 동화작가
